입안에 굴리며 음미하는 ‘시의 맛’
입안에 굴리며 음미하는 ‘시의 맛’
  • 이슬기 기자 (wonderkey@the-pr.co.kr)
  • 승인 2013.02.22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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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께끼 풀듯 읽다보면…잊고 있던 자신을 발견

[더피알=이슬기 기자] 시읽기에 대한 기사를 써보자 마음먹고 인터뷰 대상을 찾던 중 황인숙 시인이 물망에 올랐다. 언젠가 시인의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나한테 토로하지 말라”로 시작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로 이어지는 시 ‘강’을 읽고 전율을 느꼈던지라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시인을 추천해준 이는 유선전화번호를 넘기며, “전화 거의 안 받으시니까 메시지를 남기세요”라고 덧붙였다. 전화를 걸자, 통화음이 채 울리기도 전에 “여보세요” 뜻밖의 기별이 반갑다. 막 메시지를 확인하려던 참이었다고. 시 읽는 법에 대해 조언을 부탁하자, 난감한 듯 완곡한 거절을 두어 번, “전화도 바로 받으신 거 보니까 아무래도 인연이...”라고 찍어 붙이는 애송이에게 시인은 기꺼이 시간을 내어 주었다.

시인을 만나기로 한 갤러리 카페에 도착하자 시인은 아직 이었다. 대신 이제하 작가, 최윤필 기자와 함께 앉아 그를 기다렸다. 그래서 오늘의 멘토는 무려 셋이 됐다. 

“왜 어릴 때 우리 수수께끼 푸느라 골똘했잖아. 그냥, 흥미로워서. 그 정도 성의와 집중력만 가지고 시를 읽으면 어렵지 않거든. 거저 먹여주기만을 바라면 시 맛을 느끼긴 어렵지. 근데 일단 느끼면 얼마나 아름답다고.”

시는 어렵다는 말에 황 시인은 수수께끼 얘기를 꺼냈다. 떠올려보니 누가 상주는 것도 아닌데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풀던 수수께끼는 참 재밌었다. 시는 함축적인 언어라서 아무래도 친절하지 않다. 그래도 다른 글에 비해 짧고 일단 풀어내면 느껴지는 강도도 다르니 효율성이 최고인 요즘 세상에 이만한 형식이 있을까 싶다.

하지만 느껴지는 게 없다면 곤란할 수밖에. 그래서 느끼는 방법, 그 친절하지 않은 문턱을 넘는 일에 대해 친절하지 않은 질문공세를 펼쳤다.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최 기자가 입을 뗐다.

“시집 소개기사를 쓸 때 어려워하는 후배들에게 해주는 얘기가 있어요. 어떤 글이든 담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거든요. 근데 시는 그걸 먼저 얻으려하면 엄청 어려워지죠. 시는 음악 같아서 마음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그대로 느끼면 되거든요. 파편적인 이미지들이 나열되는 ‘이미지놀이’ 같다는 생각도 드는데, 그걸 굳이 해석하고 정리하려는 강박을 벗고 그대로 느끼면 돼요.”

“일단 시집을 사”…시집의 ‘물성’도 매력의 한 축

이어지는 실질적인 코멘트는 “일단 시집을 사라”다. 먼저 서점에 가서 시집을 뒤적여보고 몇 문장 읽어본다. 마음에 들면 몇 권이든 사서 가까이 두고 읽어보는 거다. 한 편 한 편 다 읽어내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좋은 부분만 읽는데, 이렇게 읽다보면 즐길 수 있는 지점이 많아진다. 시집 뒤에 포함된 해설을 참고하는 것도 좋다. 훨씬 더 정교하게 읽은 사람이 낱낱이 분석해 놓은 글이니 도움이 된다.

“시집은 싸고, 가볍죠. 개인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판형이라고 생각해요.”
“책장 넘기는 감촉은 시에 맛을 더하는데, 스마트폰 터치에 비할 바가 아니죠.”
“시를 읽는다는 게 감성을 깨우고 감각을 풍성하게 하는 일인데, 촉감도 빼놓을 수 없지.”

시집의 ‘물성’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다. 문득 책장의 촉감과 사락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다르게 느껴진다. 모두 ‘시의 맛’을 이루는 한 부분이란다.

 “리듬감도 놓치면 안 되지. 저절로 입에 구르게 하면서 암송하면 멋있잖아. 기억력에도 아주 그만이야. 또 시에 편하게 접근하는 방법은 노랜데, 밥 딜런이나 레너드 코헨 노래들만 봐도 가사가 좋아서 그 자체가 시거든.”

이런 매력들을 느끼려면 어떤 시를 읽으면 좋을까? 개인의 취향이 다양한 만큼 시 취향도 제각각이니 직접 고르는 게 최고라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좋은 시인을 물었다. 이에 이 작가는 어렵지 않으면서도 깊이도 느낄 수 있는 김광규 시인의 시를, 황 시인은 이해하기도 쉽고 잘 짜인 송경동 시인의 시를 꼽았다. 우리에게 친숙한 김소월, 김영랑, 백석 등 옛 시인의 작품을 차분히 읽는 것도 추천할만하다고.

시 읽기는 녹슨 마음에 숨은 건반을 누르고 현을 튕기는 일

예전에 비해 시를 즐기는 인구가 많이 줄었다. ‘이 좋은 걸 왜 모르지?’에 대해 불이 붙은 대화는 다른 즐길 거리가 너무 많아져서, 낭만에 사는 시대가 없어져서, 예전에는 연애편지에 쓸 멋진 구절을 찾느라 읽었지만 이젠 연애의 형식이 달라져서 등으로 이어졌다. 아무래도 그동안 우리가 잃은 건 자분자분 글을 음미하는 여유 아닐까.

“시를 읽는다는 건, 메마르고 녹슨 마음에 숨은 건반을 눌러주고 현을 튕겨주는 일이야. 내게도 이런 마음이 있었나, 잊고 있던 자신을 발견하게 하거든.”

황 시인이 건넨 마지막 말을 내내 입안에 굴려보고 음미해본다.

▲ (왼쪽부터) 최윤필 한국일보 선임기자, 황인숙 시인, 이제하 작가.

최윤필 한국일보 선임기자

1992년 한국일보에 입사했다. 바깥으로 밀려나는 것들의 사연을 담은 인터뷰집 <어느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2010)를 냈다. 한국일보에 ‘최윤필의 공간엿보기’를 연재하고 있고 직접 만든 가구전시회를 여는 목수다.

황인숙 시인

1984년 시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로 등단해 데뷔했다. 시집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1988),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1998), <자명한 산책>(2003) 등을 내놓으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해방촌에서 고양이 3마리와 함께 살며 주변 길고양이들의 먹이를 챙긴다. 작품 속에도 고양이가 많이 등장해 ‘고양이 시인’이라고도 불린다. 동아일보에 ‘황인숙의 행복한 시읽기’를 연재하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웹진에서 시배달을 한다.

이제하 작가

1959년 시와 소설로 등단해 ‘환상적 리얼리즘’이라는 소설적 수법을 개척해왔다. 시와 소설, 미술과 음악을 넘나드는 전방위 예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소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1985)를 비롯해 다수의 작품을 발표했다.
다음은 최근 발표한 <판타스틱 미니픽션집 코>(2012)에 부친 허연 시인(매경 기자)의 추천사.
“한국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경계 없음의 미학’을 지닌 그에게는 나이의 경계, 장르의 경계, 이념의 경계 같은 집단주의가 그어놓은 구분선이 없다. 오로지 이제하식 시각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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