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친아’가 될 수 없는 당신에게
‘엄친아’가 될 수 없는 당신에게
  • 김현성 칼럼니스트 (.)
  • 승인 2013.10.30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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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성 문화돌직구] 부모 신분이 세습되는 세상

“아버님, 어머님이 두 분 다 대학교 교수? 이야, 엄친아시네.”

어느 예능 방송의 진행자가 출연자에게 말했다. 다른 출연자들도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나는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엄친아의 의미와 달라서 당황했다. 아, 달라진 기준을 내가 몰랐구나 생각했다. 주고받는 얘기를 듣자니 그들이 말하는 엄친아의 기준이 어렴풋이 정리됐다. 그렇지만 생각할수록 그 기준이 모호해서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몇몇 인물을 대입해봤다.

일단 나, 이번 생에는 엄친아가 될 수 없다. 지극히 평범한, 내세울 것 없는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이다. (아버지, 어머니, 좀 분발하지 그러셨어요.)

‘못 말리는 짱구’의 짱구는 엄친아가 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짱구의 아버지가 일류 대학을 나온 엘리트이자 고속승진한 대기업 계장인 탓이다. 이런 추세로 임원까지 오른다면 짱구는 십대 중반이나 스무 살 무렵에 엄친아의 호칭을 달게 될 것이다.

젊은 장교와 바람이 나서 가족을 떠나고 결국에는 기차에 몸을 던지게 되는 안나 까레니나와 자신의 지위와 체면 때문에 이혼도 안 해주고 아내를 말려죽이다시피 한 알렉세이 까레닌 사이에 태어난 세료지아는 ‘엄친아’다. 아버지가 러시아의 현직 장관이기 때문이다. 엄마의 사회적 평판(그녀 개인의 삶에 대한 객관적 평가와 상관없이)이 조금 안 좋아도, 아빠의 지위가 그 정도면 엄친아 자리에서 내려올 염려가 없다.

완득이. 그 아이는 부단히 노력해서 무에타이 세계챔피언은 될 수 있을지언정 엄친아는 될 수 없다. 아버지가 난쟁이처럼 키가 작고, 심지어 춤을 추기 때문이다. 일단 춤을 추거나 뭐 그런 직업이면 땡, 탈락이다.

전원일기 김 회장(최불암)의 세 아들 또한 엄친아는 못된다. 훤칠하고 의젓한 첫째(김용건)는 아들(하정우)을 잘 키워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고, 잘생긴 둘째(유인촌)는 문화부장관까지 지냈지만 엄친아는 결코 될 수 없다. 아버지가 기업 회장이 아니라 ‘마을 회장’이기 때문이다. 셋째 아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개그맨 김구라 씨의 아들 동현 군의 경우는 조금 아슬아슬한데, 결론적으로 엄친아가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방송인의 아들이지만, “아버님이 김구라 씨에요? 이야, 엄친아네!” 하기는 뭔가 어색하다. 어쩐지 문장이 매끄럽게 완성되지 않는 느낌이다.

엄친아는 단순히 재산이 많고 인지도가 높다고 가질 수 있는 호칭이 아닌 것이다.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최상위 ‘직업군’에 속해 있거나 그게 준한다고 인식될 만한 ‘재산’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동현 군의 엄친아 호칭은 김구라 씨가 100억 규모의 빌딩을 세우는 날이 온다면 그때 심도 있게 논의할 일이다.

이렇게 대입을 하다 보니 서글퍼졌다. 평범한 청소년들의 자조 섞인 유머였던 ‘엄친아’는 의미가 둔갑하여 1%의 세상으로 가버렸다. 예전엔 능력 있고 노력하는 아들, 딸이면 누구나 엄친아가 될 수 있었다(이빨만 잘 닦아도 엄친아가 될 수 있었다!).

이제 엄친아는 부모의 신분에 의해 세습된다. 누구보다 억울한 것은 세상의 평범한 아버지, 어머니이다. 자식들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바치는 우리네 부모님들은 당신의 가진 것 없음으로 자식들이 엄친아로 불릴 수 없는 현실에 가슴이 미어질 것이다. 방송에서 “아버님이 변호사? 엄친아시네” 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김현성

가수

기사제공 논객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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