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소녀’ 소동, 언론이 돌 던질 자격 있나
‘천재소녀’ 소동, 언론이 돌 던질 자격 있나
  • 문용필 기자 (eugene97@the-pr.co.kr)
  • 승인 2015.06.11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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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토크] 기본 중의 기본 ‘팩트체크’ 안해…이슈에 ‘우르르’ 부화뇌동

[더피알=문용필 기자] 미국 최고의 명문대인 하버드와 스탠포드에 동시입학할 것으로 알려지면서 언론에 대서특필됐던 재미교포 여고생 김모양이 합격통보를 받지 못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적잖은 파장이 일고 있다. 복수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두 대학 모두 김양의 합격사실을 부인했다.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보면 국내 유수의 언론들이 한 여고생의 ‘허언’에 낚인 듯한 모양새다.

▲ 하버드‧스탠퍼드 동시 입학 논란에 휩싸인 김 모양./사진: 김 양 가족, 뉴시스

하지만 언론은 단지 김양의 말만 믿고 오보할 수밖에 없었던, ‘피해자’이기만 한 걸까?

이번 소동은 최소한의 검증 없이 이슈에 우루루 몰렸다가 언제 그랬냐는듯 삽시간에 태도를 바꿔버리는 한국 언론의 속성이 잘 드러난 상징적 장면이다.

김양의 동시합격 소식을 처음 보도한 언론은 재미언론인 <워싱턴 중앙일보>였다. 이 신문은 지난 2일자 기사를 통해 “두 학교(하버드‧스탠퍼드)는 합의 하에 김양으로 하여금 스스로 졸업할 대학을 결정하도록 하기 위해 스탠포드에서 초기 1~2년, 하버드에서 나머지 2~3년 동안 공부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제안을 했다”고 전했다.

아울러 “하버드와 스탠포드는 서로 교수들을 통해 자신의 학교에 와달라는 메시지를 꾸준히 보내는 등 김 양을 향한 스카우트전까지 벌인 것으로 전해졌다”고 덧붙였다. 사실이라면 이 신문의 표현대로 ‘전례를 찾기 어려운’ 사건이었다.

미국발(發) ‘천재소녀’의 뉴스에 같은 국민으로서 뿌듯했던 것일까. 국내 언론들은 앞 다퉈 김양의 소식을 전하기 바빴다. 메이저 언론의 미국 현지 특파원 보도에서부터 타 언론 기사를 베껴 쓴 중소매체까지 셀 수도 없는 김양 관련 보도가 쏟아졌다. 순식간에 화제의 인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김양은 CBS 라디오 <박재홍의 뉴스쇼>와 직접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신데렐라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경향신문>이 10일 내놓은 단독보도는 잔칫집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김모양의 주장이 상당 부분 사실과 다른 것으로 드러났다”며 “두 대학은 김양이 공개한 합격증이 모두 위조됐다고 경향신문에 확인했다”고 보도하며 거짓 의혹을 제기한 것.

이 신문에 따르면 애나 코웬호번 하버드대 공보팀장은 “김양이 갖고 있는 하버드 합격증은 위조된 것”이라고 밝혔다. “스탠퍼드대에 2년 간 수학한 뒤 하버드대에서 공부를 마치고 어느 한 쪽으로부터 졸업장을 받는 프로그램은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리사 라핀 스탠퍼드대 대외홍보담당 부총장도 “김양 측이 (경향신문을 통해) 공개한 스탠퍼드 합격증은 위조됐다. 진짜가 아니다”고 언급했다.

김양의 동시합격 뉴스를 최초 보도한 <워싱턴 중앙일보>도 오보를 인정했다. 이 신문은 10일 “기사 작성 당시 김 양 가족이 제시한 합격증서와 해당 대학교수들과 주고 받은 이메일 등 20여 페이지 분량의 문건을 근거로 기사 작성을 했으나, 해당 대학과 교수에게 사실 확인을 끝까지 하지 않은 우를 범해 사실과 다른 보도를 하게 됐다”고 정정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김양에 칭찬일색이던 대다수 국내 언론들도 의혹 제기에 가세했다. 불과 열흘도 채 안돼 분위기가 180도 달라진 것이다. 두 개의 상반된 뉴스를 똑같은 기자(특파원)가 보도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벌어졌다.

이는 언론의 기본 중의 기본인 ‘팩트체크’가 부실했기 때문에 벌어진 소동으로 보인다. 호들갑(?) 떨기 전에 단 한번만이라도 동시합격이 사실인지 대학 측에 문의했다면 금방 알 수 있는 사안이었다. 하지만 김양 소식을 보도한 대부분의 언론들은 학교 측에 어떠한 문의도 하지 않고, 김양 측 주장을 일방적으로 기사화했다.

게다가 일부 뉴스통신사와 메이저 신문들의 경우, 자사 특파원을 미국에 파견해 놓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보다 심층적인 현지 취재가 가능함에도 국내에 있는 기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보도 태도를 보인 셈이다.

물론 언론의 입장도 일견 이해가 가기도 한다. 의문을 가질만한 정황이 약했기 때문이다. 김양이 재학 중인 학교는 미국에서도 명문고에 속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김양의 아버지는 국내 유수 일간지의 워싱턴 특파원을 지내고 현재 모 대기업의 임원으로 재직중이다. 어딜 봐도 반듯한 김양과 그 가족의 말에 의문을 품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감안해도 줄줄이 이어진 ‘대형오보’의 잘못이 가려지지는 않는다. 사실을 검증해야 할 언론이 부화뇌동하며 사실을 더욱 흐리게 했다. 

그런데도 오보를 인정하고 독자에게 사과한 언론사는 <미주 중앙일보>와 <중앙일보>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손에 꼽을 정도다. 김 양과 직접 인터뷰를 한 CBS 라디오 <박재홍의 뉴스쇼> 역시 “청취자 여러분들게 혼돈을 드린 점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 김 양 관련 뉴스에 대한 오보를 인정한 <워싱턴 중앙일보>의 사과문./사진: <워싱턴 중앙일보> 사이트 화면.

이 와중에 한 신문은 “당사자의 주장을 철저한 검증없이 보도한 점에 대해 독자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라는 입장을 나타냈지만 “4일자 (김 양) 관련 기사를 취소합니다”라는 표현을 썼다. 얼핏 보면 “정정하겠습니다”라는 말보다 더 완곡하게 느껴지지만 그저 오보를 잘라내버리면 된다는 식으로 읽히기도 한다.

김 양의 동시합격 소식을 전한 대다수의 국내 언론들은 별다른 사과 없이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분위기다. 언론의 가장 큰 덕목인 ‘정확성’이 깨졌는데도 말이다. 그저 새롭게 제기된 이슈만 보도하면 된다는 식의 이같은 태도는 뉴스소비자의 신뢰를 져버리기에 충분하다. 일시적인 ‘굴욕’을 감수하고라도 오보를 사과하는 언론의 책임감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현재로서 한 가지는 분명한 사실인 듯하다. 설령 이번 논란이 김양의 거짓말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 할지라도 거짓을 키우고 확산시킨 데에는 언론들이 역할했다는 점이다. 과연 언론은 김양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


*김양의 아버지 김모씨는 “사실이 아닌 내용으로 큰 물의를 일으켜 진심으로 죄송하다”며 11일(현지시간) 공식적으로 사과의 뜻을 나타냈습니다.

김씨는 국내 언론들에게 보내온 입장자료를 통해 “실제로 모든 것이 다 제 잘못이고 제 책임”이라며 “그동안 아이가 얼마나 아프고 힘든 상태였는지 제대로 살피지 못한 점, 오히려 아빠인 제가 아이의 아픔을 부추기고 더 크게 만든 점 마음속 깊이 반성한다”고 밝혔습니다.

아울러 “앞으로 가족 모두 아이를 잘 치료하고 돌보는데 전력하면서 조용히 살아가겠다”며 “상황 파악이 끝나지 않아 일일이 설명드리지 못하는 점 용서해 달라”고 전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김씨는 “어떤 상황에서도 저에겐 세상에 둘도 없이 소중한 가족”이라며 “아이와 가족이 더 이상의 상처없이 치유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보도와 영상 촬영을 자제해주실 것을 언론인 분들께 간곡히 호소드린다”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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