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이민 포스터의 숨은 의미
한국 최초 이민 포스터의 숨은 의미
  • 신인섭 (admin@the-pr.co.kr)
  • 승인 2013.10.17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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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섭의 PR 히스토리]놀라운 PR매체 포스터

[더피알=신인섭] 1903년 1월 13일 남자 56명, 여자 21명, 어린이 25명 총 102명이 탄 갤릭(Gaelic)호가 하와이 호놀루루에 도착했다. 한국 최초의 이민이었다.

▲ 1903년 8월 6일자로 항구 각처에 내붙인 하와이 이민 모집 포스터.
이렇게 시작된 이민은 1905년에 체결된 을사보호조약 때문에 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 박탈당해, 이후 65 차례에 걸쳐 7000여명의 한국인이 하와이로 갔다.

이 때 한국인 이민자를 모집하려고 국내 여러 항구에 나붙은 포스터가 있었다. 7조항으로 된 이 포스터를 지금 쓰는 말과 글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고시
대미국 하와이 정부의 명령을 받아 공표함.

1. 하와이 군도로 누구든지 일신 혹은 권속(가족)을 데리고 와서 주접(住接. 자리잡고 살고자)하여 간절히 원하는 자에게 편리케 주선함을 공급하노라.

2. 기후는 온화하여 태심(매우 심한) 더위와 추움이 없으므로 각인의 기질에 합당함.

3. 학교 설립법이 광대하여 모든 섬에 다 학교가 있어 영문을 가르치며 학비를 받지 아니함.

4. 공부(工夫. 학문이나 기술 등을 배우고 익힘)를 위하여는 매년이나 절기든지 직업 얻기가 용이한데 신체가 건강하고 품행이 단정한 사람은 여일(如一. 한결 같이)하고 장구한 직업을 얻기 더욱 무난하고 법률의 제반 보호를 받게 함.

5. 월급은 미국 금전으로 매삭(10일마다) 15원(일본 금화 30원, 우리 돈으로 57원 가량)씩이요, 일하는 시간은 매일 10시 동안이고 일요일에는 휴식함.

6. 공부의 유숙하는 집과 나무와 식수와 병을 치료하는 경비는 고용하는 주인이 지불하고 공부에게는 받지 아니함. (‘공부’의 첫글자가 분명치 않음)

7. 대한제국에 이 고시를 공포하는 권을 주는 사(事. 줌).

호놀룰루 1903년 8월 6일
대미국 영지(領地) 하와이 이민 감독 겸 광고대리 사무관 벤슨 고백


이같은 내용을 풀어보면, 첫째 조항은 하와이 이민 취지이다. 둘째는 기후가 온화하다는 정보 제공이고, 셋째는 무료 교육 시설이 있다는 사실에 대한 내용이다. 넷째는 학업과 취직의 기회가 있으며, 법의 보호 또한 받는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 최초의 이민 일가 모습.
다섯째의 경우 급여에 대한 노동 조건과 급여에 대한 설명으로, 이에 따르면 하루 노동시간은 10시간, 일요일 휴무에 급여는 10일에 15달러 즉, 하루 1.5달러이다. 이는 한국 돈으로는 5원70전이므로, 미국 1달러를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3.8원인 셈이다.

여섯째 조항은 숙식, 의료비 제공에 대한 것이고, 마지막 일곱째는 고시를 하는 권한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를 통해 나무, 물 등의 제공과 의료비 부담 등의 책임이 고용자에게 있음을 밝히고 있다.

당시의 이민자 포스터에서 눈에 띄는 점은 사용된 말이 비교적 쉽다는 것이다. 아마도 포스터 대상인 이민자를 배려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 한국사회 상황을 보면 전신도 있었고, 1904년 경부선 철도도 개통됐다. 통신발달이 태동하는 단계였던 것. 하지만 이민자 포스터가 게재된 곳은 항구였기에, 지역 특성상 구전(口傳) 효과가 더 컸을 것이므로 광고 보다는 PR 효과를 노린 전략적 판단으로 보인다.

7조항으로 구성된 포스터…광고보다는 PR효과 커

하와이 이민에는 숨은 이야기가 있다. 이민의 발단은 휴가차 고향인 미국 오하이오주로 가던 의사 겸 선교사이자 주한 미국 공사였던 호레스 앨런(Horace N. Allen)이 하와이에서 사탕수수밭 주인을 만나면서부터다.

이후 앨런은 고종 황제에게 아뢰어 허락을 얻어 이민을 본격화했다. 이민 업무는 민영환이 맡은 수민원(綏民院)에서 주관했고, 하와이 농장주협회에서 자금을 받아 회사를 차린 미국인이 실무를 관장했다.

▲ 20세기 초 여권 사진.
하지만 하와이로 가려는 사람을 찾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그 당시 하와이로 떠나는 것은 다시 고향땅에서 재회하기 힘든 그야말로 생이별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인천에 있던 한국 최초의 내리감리교회 담임 사역자이던 조지 H. 존스(George H. Jones. 한국명 조원시)가 앞장서서 이민에 대한 설명을 해서 50여명의 내리감리교회 신도가 이민길에 올랐다. 1905년 존스 목사 보고에 의하면 하와이 이민자의 3분의 1이 기독교인이었다고 한다. 개화기 기독교의 영향은 이런 데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배우지 못한 한국민들이 생이별하듯 고국을 떠나 하와이에 정착해 고생 끝에 번 돈으로 한국독립운동을 위해 이바지한 일은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아 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었다.

이렇게 볼 때 1903년 우리나라 여러 항구에 붙여 있던 이민 포스터는 놀라운 PR매체였음이 분명하다.

 

신인섭

전 한림대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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