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한 월드’를 끝장낼 수 없는 이유
‘임성한 월드’를 끝장낼 수 없는 이유
  • 김현성 (admin@the-pr.co.kr)
  • 승인 2013.11.22 13: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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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성의 문화돌직구] 드라마를 향한 대중의 분노②

‘임성한 월드’는 없다에 이어...

막장의 계보가 있다. 독보적이라 할 수 있는 임성한 작가를 필두로, 방송사에서 공개 사과까지 했던 ‘밥줘’의 서영명, 막장의 맛을 알아버린 ‘조강지처 클럽’ ‘수상한 삼형제’의 문영남, 그리고 그 유명한 ‘아내의 유혹’의 김순옥 작가까지. 이들은 막장드라마의 사대천왕이라 할 만하다. 이밖에도 수많은 작가들이 막장 대열에 편승했다.

방송가에는 막장이 아니면 편성을 받기 힘들다는 얘기가 파다하다. 실제로 그랬다. 아침 저녁으로 막장드라마가 방영됐고, 대중의 피로감은 심각하게 쌓여갔다. MBC 일일드라마 ‘오로라 공주’에 대한 최근 비난여론은 그 자체가 막장인 드라마 탓도 있지만 그동안 쌓인 대중의 피로감이, 아픈 곳을 몽둥이로 얻어맞은 것처럼 한 지점에서 폭발한 측면도 있다.

▲ mbc 일일드라마 '오로라공주'는 막장논란과 함께 온라인상에서 연장 반대 투표와 함께 임성한 작가 퇴출운동까지 촉발시켰다. 사진출처=mbc 홈페이지.

막장의 내부는 문화상품의 이권을 둘러싸고 기획사, 연기자, 작가, 방송국, 기업 등 다양한 관계자들(대중을 포함한)의 욕망이 복잡하게 엉켜 있다. 막장을 비난할 수는 있지만 끝장낼 수 없는 이유다.

사실 막장드라마를 나쁘다고만 할 수도 없다. 드라마는 문화상품이다. 말 그대로 문화예술의 한 분야이지만 산업의 주요 분야이기도 하다.

막장은 드라마의 산업적인 측면을 극단에 밀어붙인 결과물이다. 위에서 언급한 작가들은 어떤 면에서는 선구자이다. 그들은 대중이 어떤 내용에 관심을 보이고,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지 연구했다. 드라마의 흥행 요소를 작품 내부에서 탐구한 것이 아니라 대중에게서 파악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핵심적인 요소들 가령 출생의 비밀, 불륜, 복수, 삼각관계 등이 돌출했다. 이들은 이야기의 내용과 그것이 사회에 미칠 영향에 대해 고민하기보다 사람들을 보게 만드는 방법에 집중했다. 그들이 극단으로 밀어붙여 알아낸 사실은 일정의 폭로에 가까운데, 대중이 결코 고상하지 않다는 것이다. 시청률의 관점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들이 보기에 일반대중은 드라마에 어떤 심오한 것을 바라지 않으며, 치밀한 서사나 개연성의 확보를 떠나 오히려 특정 요소들에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일군의 작가들이 드라마 시청률의 비밀을 풀어낸 것이다. 아니, 풀어냈다기보다 작가들 사이에 떠돌던 ‘설’들을 과감하게 드라마로 구현해버린 것이다. 방송사에게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드라마의 흥행, 즉 회사의 수익이 보장되는 구조를 발견한 셈이니 말이다.

드라마는 매체 특성상 다룰 수 있는 이야기가 한정적이다. 특히 아침드라마나 일일드라마는 우리의 일상을 담아내는 것이지, 실험적인 이야기를 다루는 도구가 아니다.

어떤 드라마가 좋은 의도와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20년 전에 나온 것과 같은 주제·형식을 답습하고 있다면 그것이 막장드라마보다 낫다고 할 수는 없다. 작품성이 뛰어난 드라마가 매번 나오기 힘든 현실에 적어도 시청률은 보장되는 막장드라마가 방송사로서는 나은 선택일 것이다.

문제는 과도한 치우침이다. 시청률이 떨어지니 작가를 교체해 출생의 비밀을 넣게 하는 방송사. 일말의 사회적 영향을 고려하지 않고 막장 스토리를 주문하는 제작사와 이에 편승하는 작가. 이 모든 야합의 행태.

이러한 행태는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거울을 보듯 바라보게 만든다. 서글프다. 막장에 대한 우리의 혐오에는 그런 서글픔을 떨쳐내기 위한 몸부림도 포함된다.

막장드라마의 배후에는 금전적 이득, 사회적 명성에 도취된 작가들의 오만함이 도사리고 있다. 유명 작가에게 집중되는 업계의 권력구조 속에서 판단력을 상실해버린 이들은 자신이 대중의 심리를 꿰뚫고 있다고, 마법사처럼 사람들을 홀려 텔레비전 앞에 불러 모을 수 있다고 믿는다. 실은 아무 것도 창작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신처럼 위대한 창조주라고 착각한다.

‘오로라 공주’가 드러낸 것은 이러한 오만함이다. 방송사의 생리와 대중을 다루는 방법을 꿰고 있다고 착각한 작가는 무기를 두 손에 들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드라마를 보게 할 만한 코드를 버무린 다음 자신이 정작 하고 싶은 것(굿 귀신 조상님 등 샤머니즘적 행태, 중도하차, 유체이탈, 강아지 출연 등 헤아릴 수조차 없다)을 마음껏 해댄다. 역시나 시청률은 실패하지 않는다. 비난이 이어져도 두려울 것이 없다. 대중은 그저 어리석고 약간 시끄러운 존재일 뿐이니까.

누군가 ‘임성한 월드’라고 표현한 것에는 한 작가의 괴상한 취향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컬트도 아니고, 문화적으로 우리에게 어떠한 가치도 없다. ‘오로라 공주’가 문화상품의 기초적인 형식을 파괴하고 있다고 비판한 어느 칼럼리스트의 말은 옳다.

문화상품의 형식은 대중과 창작자 사이의 약속이며, 문화가 작동하는 기본 바탕이다. 이런 약속을 아무렇지 않게 깨버리는 행태는 용인할 수 있는 선을 넘어버린 오만일 뿐이며, 어떤 그럴듯한 단어로도 그것을 포장해선 안 된다.

 

 

김현성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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