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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12시 평양, 어느 조선인 중학생의 기억
1945년 8월 15일 12시 평양, 어느 조선인 중학생의 기억
  • 신인섭 (1929insshin@naver.com)
  • 승인 2020.08.14 15: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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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동원 장소서 들은 “니혼 마께따요”
평양 시내 수놓은 독립 한국의 환희와 역사의 아이러니
1943년(?) 학교 음악실에서 연습 중인 클라리넷 파트. 뒷줄 오른쪽이 필자(신인섭)이고 왼쪽이 일본인 동기생(사까모도 타다오), 가운데는 일년 선배이며 앞줄 네명은 후배들. 사진: 사까모도 제공
1943년(?) 학교 음악실에서 연습 중인 클라리넷 파트. 뒷줄 오른쪽이 필자(신인섭)이고 왼쪽이 일본인 동기생(사까모도 타다오), 가운데는 일년 선배이며 앞줄 네명은 후배들. 사진: 사까모도 제공

[더피알=신인섭] 1945년 8월 15일 정오까지, 일본 식민지 조선(한국)은 1941년 12월에 시작된 태평양 전쟁에 휘말려 있었다.

중학교 학업은 사라졌고 그 대신 근로 봉사에 동원되어 있었다. 나는 평양사범학교 4학년이었다. 나이는 열여섯 살. 식량이라고 배급해 주는 것은 만주에서 기름을 빼고 난 콩깻묵이었다. 두께가 아마 15cm 쯤이고 직경이 1m 쯤인 크기인데 그것을 까서 나주어 주었다. 짐승이 먹는 식사였다.

평양에는 육군 항공대가 있었는데 1945년에는 작은 활주로에 격납고가 몇 개 있는 조그만 비행장이었다. 활주로 확장 공사에 중학생들을 동원해 탄광의 석탄을 나르듯이 궤도를 깔고 흙을 실어 날랐다. 불도저가 있었다면 하루에 해치울 수 있는 일을 여름 방학 동안 학생들을 동원해 하는 ‘원시적’인 작업이었다. 점심으로는 보리빵 두 개, 주린 배를 채우기에는 턱이 없었다. 내가 3학년 때 일이었다.

4학년이 되자 우리는 평양 시내에서 일하게 되었다. 미군 B29가 유유히 한국 하늘을 날고 쳐다만 보던 ‘딱한’ 시기였다.

일본군은 평양 비행장의 수많은 비행기 부품을 소개해 두려고 시내 개신교 교회를 모두 접수해 항공기 부품 창고로 개조했고 중학생은 그 정리에 동원했다. 일본으로서는 일석이조였다. 미군은 교회를 폭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알고 있었고 또한 일요일에 조선인들이 교회에 모여 애배하는 것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따금 쉬는 시간이 되면 내가 태어난 고향 교회 생각이 났다. 그리고 일본이 하는 짓이 하나님의 벌을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떠올랐으나 그때뿐이었다.)

내가 일하던 장소는 경창리(景昌里) 교회(?)로 이미 신사참배 거부로 문을 닫은 평양숭실전문학교에서 길 건너편에 있었다.

이 지역은 평양의 ‘크리스천 타운’이라 할 수 있는 곳으로 비행기 부품 창고가 된 경창리 교회에서 북쪽으로 약 500m 거리에는 폐교된 평양 신학교가 있었고, 다시 500m쯤 내려가면 소위 ‘양촌(洋村)’이라 부르던 선교사 주택이 있었다. 그리고 남쪽에는 기독교 병원이 있었고 광성(光成)중학교, 광성국민학교, 정의(正義)여학교 등 모두 기독교계 학교가 있었다. 해방되던 해에는 중학생은 근로동원, 국민학교 학생은 소개되어 지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8월 15일, 라디오 ‘중대방송’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부품 정리에 바쁜 우리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스피커를 통한 중계도 없었다. 점심시간이 얼마 지나 다시 작업장으로 오는 길에 나와 같은 브라스 밴드에 있는 친구 아버지를 만났다. 초등학교 선생이신 이 분 말씀이 “일본 졌어(니혼 마께따요)”라 하셨다. 일본말이었다. 75년 전인 1945년 8월 15일 정오 무렵에 일어난 일로 내가 기억하는 것은 이뿐이다.

나는 해방 전 평양의 명물 평양사범학교 브라스 밴드에서 클라리넷을 불었다. 20여명의 밴드는 거의 모두 조선인 학생이었다. 해방이 되자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위대한 해방군’ 소련군이 평양역에 도착하는데 환영 나가라는 연락을 받았다.

부랴부랴 준비를 하면서 부딪힌 문제가 소련 국가였다. 아무도 소련 국가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 때 떠오른 것이 사범학교 음악교과서에 있는 소련 국가였다. 이 곡을 가지고 브라스밴드 연주용으로 편곡을 해야 되는데 누구한테 갈 것인가? 언뜻 떠오른 이가 작곡가 김동진(金東振) 선생이었다. 쌀 소두(小斗) 한 말을 메고 김선생 댁을 무턱대고 찾아갔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악보를 받았다. (1945년 8월 평양 시내에서 쌀은 ‘금싸라기’였다.)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 곡에 맞춘 애국가와 소련 국가 연습은 간단했다. 어느 날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8월 하순이었을 것이다. 평양역에 입성하는 소련군을 위한 환영식이 있었다. 건국준비위원회 대표 여러분과 우리 브라스 밴드 10여명, 그리고 꽃다발을 든 소녀가 나란히 서 있다가 1개 소대쯤 되는 소련군 선발대가 탄 열차가 플랫폼에 들어서고 열차에서 내려 정렬해 서자 애국가와 소련 국가가 울려 퍼졌다. 환영 인사와 악수, 꽃다발 증정 등으로 환영식은 끝났다.

1946년 8월 26일 '소련군 환영대회'를 마친 평양 시민들이 트럭에 나눠 타고 평양 시내를 행진하고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그 뒤에 알게 된 것이지만, 당시 소련 국가가 제정 러시아 국가였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환영 나간 우리도 몰랐고 환영 받은 소련군 선발대도 마찬가지였다. 왜 그랬을까. 두 가지 이유일 것이다.

첫째로 공산주의를 반대하던 일본은 소련 국가가 아닌 제정 러시아 국가를 음악 교과서에 실었다. 다음으로 소련 군인들의 연령인데 아마 20내 초반이거나 중반이었을 선발대는 1920년대 출생이었을 것이므로 1917년에 타도된 제정 러시아 국가를 알 리 없었다. (만약 이 사실을 알았다면 난리가 났을 수도 있다.)

시가행진과 조선의 노래

평양사범학교 브라스 밴드가 중심이 된 3개 중학교 연합 밴드가 평양 시내를 누비며 애국가와 ‘조선의 노래’ 그리고 또 한 곡을 불며 시가행진을 한 것도 이 무렵이다. 해방된 조선의 브라스 밴드가 연주할 노래는 겨우 3곡이었다.

세월이 흘러 내 나이 팔십을 넘어 다시 그 곡을 찾게 되었다. 가사는 3절이며 1932년 4월 1일 동아일보 창간 22주년 되는 날에 발표된 이은상의 가사 마지막에는 “광명한 아침 날이 솟아오르면 깃븜에 북받혀 놀애하리라”는 구절이 있다. 국가가 없던 시절 ‘사실상 국가 역할을 한’ 노래였다.

조선총독부는 1938년 이 노래를 금지했다. 다시 7년의 세월이 흘러 일본제국주의가 망한 달에 평양 시내를 울리며 행진한 조선인 학생들의 브라스 밴드가 연주한 노래 세 곡 가운데 하나는 ‘조선의 노래’였다.

일제 강점 하에서 배운 음악과 음악책, 터득한 연주 솜씨와 일본제 악기로 해방된 독립 한국의 환희를 연주했다. 일본제국주의가 떠난 뒤 평양 시청에는 새 주인의 얼굴이 등장했는데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 김일성의 초상화였다. 사범학교 도화(圖畵. 미술을 그렇게 불렀다) 선생은 이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다. 새 노래가 둘 나타났다. “장백산 줄기 줄기 피어린 자욱...”으로 시작하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 그리고 “광활한 대지 위에 새 태양 뜨니...”라는 스탈린 대원수의 노래였다. 김일성은 ‘장군’이고 스탈린은 ‘대원수’였다.

다시 5년 후 소련군이 훈련하고 소련제 무기로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김정은의 할아버지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일으킬 줄은 몰랐다. 이날은 일요일이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도 일요일 새벽이었다. 그리고 탱크와 야크 비행기를 준 소련 공산주의가 무너진 지는 거의 20년이 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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