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정치적 환상과 21세기 대한민국
20세기 정치적 환상과 21세기 대한민국
  • 이대현 (guriq@naver.com)
  • 승인 2016.10.25 09: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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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더 킹즈 맨’ 이야기가 여전히 통하는 이유

정치는 영화와 비슷하다. 연기와 거짓말로 사람들에게 착각과 환상을 심어준다. 국회의원 선거 때만 되면 세상은 금방이라도 천국으로 변할 것만 같다. 모든 후보자가 당선만 되면, 자리에 앉기만 하면 실현 불가능한 것이 없을 것처럼 말한다.

▲ 정치인들은 선거 때만 되면 온갖 장밋빛 약속으로 국민을 유혹한다. ⓒ픽사베이

대통령을 하겠다는 사람들도 온갖 장밋빛 약속으로 국민을 유혹한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새로운 정권을 시작하면 국민 모두가 원하는 곳에서 일하고, 돈 들이지 않고 공부하고, 누구나 평등하게 대접 받는 세상이 온다. 청년실업도, 흙수저니 금수저니 하는 우리사회의 높은 계층의 벽도, 극심한 빈부격차도 사라진다.

벌써 누구는 모두 꿈을 이루는 성공사회를, 또 누구는 모든 사람이 골고루 나누어 가지는 세상을 이야기하면서 사람들을 모으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대권 야심을 드러내고 있다. 처음보는 모습도 듣는 소리도 아니다. 5년 전에도 그랬고 10년 전에도 그랬다. 절망과 후회, 연기와 거짓말은 계속된다. 

예나 지금이나, 미국이나 한국이나 정치인은 같다. 그래서 그들을 풍자한 문학은 세월이 흘러도 유효하다. 1946년이니까, 무려 70년 전에 퓰리처상을 수상한 로버트 펜 워렌의 ‘올 더 킹즈 맨’이란 소설이 있다. 1930년대 미국의 작은 마을 메이슨시티 출신 정치인에 대한 이야기다.

시골의 보잘 것 없는 재정관인 윌리는 강직하고 열정적이다. 학교 교실 붕괴로 학생들이 희생되자 그는 건설비리와 부실공사를 맹렬히 비난한다. 그것으로 유명세를 탄 그는 루이지애나 주지사에 출마한다. 부패한 기존 정치인들과 부정부패를 몰아내고 ‘새로운 시민들을 위한 이상사회’를 만들겠다고 결심한다.

윌리는 ‘순수’한 이미지를 위해 스스로를 촌뜨기라고 내세우며, 거리에 나가 외친다. “부자들 돈 왕창 빼앗아 도로와 다리를 건설하고, 누구나 갈 수 있는 대학과 무료병원을 세워 골고루 잘사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마치 정치를 전혀 모르는 것 같은 촌놈의 말이니 귀가 솔깃해진다. 부자들 돈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겠단다. 그것도 도둑질이 아닌, 합법적으로.

그는 “투표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다. 가진 것 하나 없는 무식한 촌뜨기가 되는 것”이라면서 유권자들의 자존심까지 건드린다.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많이 들어본 얘기다.

윌리는 마침내 가난한 사람들의 열광적 지지로 주지사에 당선된다. 그러나 그의 세상 바꾸기는 시작부터 부자들과 기성 의원들의 높고 두꺼운 벽에 가로막힌다. 부자들은 그의 분배와 평등정책을 선전포고로 받아들이고, 석유회사와 전력회사는 온갖 수단을 동원해 저항한다.

▲ 1930년대 미국의 작은 마을 메이슨시티 출신 정치인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 영화 '올 더 킹즈맨'의 한 장면.

그럴수록 윌리는 더욱 권력을 쥐어준 가난한 유권자를 무기로 그들을 몰아 부친다. 아니 뻔뻔하고, 교묘하게 그런 척한다. 손으로는 자신의 권력유지와 탐욕을 위해 비리를 서슴지 않으면서, 입으로는“부자들이 나를 파멸시키려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을 파멸시키고 싶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의지가 저의 힘 입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나의 정의입니다”라고 떠든다. 그의 거짓말과 연기에 사람들은 또 속고 환상에 빠진다.

윌리는 처음부터 정의의 사도도, 양심 세력도 아니다. 그 역시 순수하고 달콤한 연기와 거짓말, 환상으로 사람들을 속인 정치인에 불과하다.

두 번이나 영화로 만들어진 ‘올 더 킹즈 맨’은 ‘시민 케인’ ‘스미스 워싱턴에 가다’와 함께 정치영화의 수작으로 꼽힌다. 겉으로 정의를 외칠수록, 속은 점점 부패하고 타락하는 정치인과 그런 인간들이 연기하는 쇼의 속성을 치밀하고 솔직하게 묘사했다.

‘올 더 킹즈 맨’에서의 정치적 환상은 평등이다. 인종, 종교, 지역, 성의 차별 없이 똑같이 대접 받고, 똑같이 가지고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꿈은 이미 2700년 전, 중국 춘추전국시대 묵자(墨子)가 꾸었다. 하인리히 야콥이 쓴 ‘빵의 역사’를 보면 인류의 반란과 전쟁과 혁명도 대부분은 ‘빵 골고루 나누어 갖기’의 몸부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등한 세상은 오지 않았고, 오히려 ‘양극화’로 불평등의 골만 깊어졌다. 앞으로 영원히 그럴 것이다. 인간에게는 소유욕이 있으며, 그 욕망의 크기와 그것을 채울 수 있는 능력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세상이 변혁해도 결과적으로 지배자나 권력자만 바꿀 뿐, 불평등은 그대로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니 윌리의 행동도 위선이고 탐욕이고 쇼다.

대부분의 영화가 환상을 무기로 한다. 그러나 정치영화만은 그렇지 않다. 아주 냉정하다. ‘정치 자체가 진실과 허구의 경계를 무너뜨려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는 환상’을 가지고 있어서일 것이다. 정치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환상적’이다.

정치 자체가 모두 환상이나 거짓말은 아니다. 그 환상을 현실로, 거짓을 진실로 바꿀 영웅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상한 단식투쟁이나 하고 누가 봐도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보기에도 민망하고 한심한 쇼나 하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짓이나 하는 정치인들은 절대 아니다. 가끔은 나만이 아닌 이웃을 생각하고 서로 조금씩 나누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원하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이 작은 소망조차 지키며 사는 것도 거짓과 탐욕, 정치쇼가 난무하는 대한민국에서는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포기할 것인가. 꿈과 희망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니라고 했다. 그 희망을 정치나 영화의 ‘환상’이 아닌, 삶으로 만들기 위해 느리지만 세상 바꾸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이 글은 논객닷컴에 게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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