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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마, 사라져도 부활할거야과거 깨워내는 ‘초판본’ 마케팅의 세계

[더피알=문용필 기자] 수십년간 잊고 지낸 기억들이 하나 둘 떠오르고 있다. 최근 문화산업 전반에 일고 있는 ‘초판본’ 열풍이 그것이다.

좋은 기억이 가득한 과거는 이를 경험한 세대에게 향수를 안겨주고 젊은 세대에게는 신선한 체험으로 다가온다. 기업들에게는 자사의 전통을 부각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마치 오랜 시간 연락이 끊어졌던 친구의 전화처럼 소비자들은 초판본의 부활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한국문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윤동주의 ‘서시’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 시가 수록된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1948년 발표된 이래 한국 시문학사의 대표적인 명작으로 남아있다.

   
▲ 초판본이 복각된 윤동주의 시집과 김구의 '백범일지'.

그로부터 60년이 훌쩍 넘은 2016년, 대한민국 출판계는 때 아닌 ‘윤동주 신드롬’에 휩싸여있다. 각종 온라인서점의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상위권을 달리는 중이다.

최근 윤동주의 생애를 그린 영화 ‘동주’가 흥행에 성공했다지만 이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윤동주의 시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굳이 책으로 사볼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기현상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김소월의 <진달래꽃>과 한용운의 <님의 침묵> 등 1920년대에 발표된 시집들이 재출간되면서 출판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것. 여기에 1947년에 출간된 <백범일지>까지 가세했다.

최첨단을 달리는 모바일 시대에서 서점들만 ‘백투더퓨처’라도 한 것일까. 어쩌면 이는 맞는 표현인지도 모른다. 앞서 소개한 책들은 모두 세상에 처음 선을 보였던 초판본 당시의 디자인을 그대로 복각해 재출간된 것들이다.

출판업계 트렌드 자리잡은 ‘복각판’

단순히 겉표지만 재현한 것이 아니다. 이제는 낯설게 느껴지는 세로쓰기에, 조악해 보이는 인쇄상태, 그리고 과거의 맞춤법까지 ‘그 시절 그대로’다. 그리고 초판본 마케팅은 도서정가제 시행 이후 침체에 빠졌던 출판업계에서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

초판본 복각서적들이 인기를 모으는 이유는 무엇보다 ‘소장가치’에 있다. 윤동주나 김소월 시집의 ‘오리지널’ 초판본을 구입한다는 것은 일반인들에게는 언감생심이다. 전국의헌책방을 이 잡듯 뒤져도 찾기 힘들뿐더러, 어렵게 구한다고 해도 상상 이상의 금액을 지불해야 한다. 참고로 지난해 12월 경매에 나온 <진달래꽃>의 초판본은 1억3500만원에 낙찰됐다.

하지만 복각판은 쉽게 구입할 수 있고 가격도 여타의 책들과 다르지 않는 수준이다. 비록 오리지널 초판본은 아니지만 얼핏 보면 구분이 힘들 정도로 재현해냈기 때문에 전문 수집가가 아닌 일반 독자들에게는 충분히 만족감을 줄 수 있다.

윤동주와 김소월, 한용운의 시집을 복각해 재출간한 김동근 소와다리 대표는 “많지 않지만 헌책방에서 (오래된 책을) 구입하는 특정 수요계층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며 “해외의 경우에는 이른바 레어북(rare book) 시장이 활성화 돼있다”고 밝혔다.

온라인서점 알라딘의 김성동 마케팅팀장은 “활자를 보는 것은 종이책이든 e북이든 다를 것이 없지만 (초판본 복각서적은) 사람들의 소장욕구를 자극한 것 같다”며 “옛날 책을 그대로 갖고 왔다는 점이 기존 서적들과 확실하게 차별화되는 듯하다”고 언급했다.

   
▲ 복각판 <백범일지>

오히려 ‘구닥다리’이기 때문에 젊은 세대에게 어필한 것도 히트요인이다. 김동근 대표는 “디자인도 그렇지만 지금과는 다른 표현이나 언어, 세로쓰기 등이 낯설지만 신선하게 보였던 것 같다”고 분석했다. 세로쓰기에 익숙한 중장년층에게는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는 ‘복고마케팅’ 전략이 되는 셈이다.

여기에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을만한 아이디어를 첨가한 것도 적중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경우, 초판본뿐만 아니라 1955년 나온 증보판, 그리고 윤동주 시인의 육필원고 사본까지 함께 제공되지만 가격은 1만원도 채 되지 않는다.

복각판 <백범일지>는 해방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듯한 소포봉투에 담겨있다. 우표와 소인까지 그대로 재현했다. 발신인은 책의 저자인 김구 선생이고 주소는 다름 아닌 대한민국 임시정부다. 여기에 ‘동지를 대한민국의 독립군으로 임명한다’는 내용의 임명장까지 담겨있어 구매자에게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출판사 입장에서 보면 저비용 고효율의 마케팅 전략이다. 따로 디자인이나 편집을 고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장기간 검증받은 ‘국민서적’이기에 신간보다 위험부담이 적다는 장점도 있다. 김성동 팀장은 “소자본으로 확실한 퀄리티가 보장되기 때문에 비교적 작은 출판사들이 시도하기에 적합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소장가치 넘어 재테크 수단까지

대중음악계에서는 10여년 전부터 초판본 마케팅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지금은 희귀음반이 돼버린 과거의 명반들을 다시 복원해 내놓는 형식이다. 이를 통해 과거 가요계를 주름잡았던 전설적인 뮤지션들의 오리지널 음원을 젊은 음악팬들도 접할 수 있게 됐다. 최규성 대중음악평론가는 “음반시장을 주도할 정도는 아니지만 확실한 자기 지분을 갖고 있다고 보면 된다”고 평가했다.

초판본 음반을 현재에 되살리는 형태는 마스터테이프(녹음 후 음반생산을 위해 만들어진 원본 테이프)의 유무에 따라 단순 재발매반과 복각반으로 나뉜다. 커버디자인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둘 다 마찬가지다.

   
▲ LP로 재발매 된 가요 음반들. 뮤직리서치 제공

복각반은 앞서 언급한 초판본 책들과 속성이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다만, 마스터테이프가 없기 때문에 복각 대상이 되는 음반의 상태가 좋지 않다면 음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책은 조악한 인쇄상태 조차 ‘멋’이 될 수 있지만, 음악을 듣는 데 있어선 잡음이 큰 방해가 된다. 최규성 평론가는 “최근에는 원저작자와의 협의를 통해 마스터테이프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며 “요즘에는 복각반 음반은 거의 없다. 이는 특수한 케이스라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초기에는 주로 CD로 초판본 음반이 재발매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LP와 카세트 테이프가 몰락하면서 오프라인 음반시장에는 CD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상황이 달라졌다. 복고와 아날로그 열풍을 타고 LP로 된 재발매 음반들이 쏟아지고 있다. 심지어 그다지 희귀하지 않은 요즘 가수들의 음반도 LP로 생산되고 있다.

최규성 평론가는 “오히려 이제는 CD로 발매하면 잘 팔리지 않는다”고 전했다. 재발매 대상이 되는 과거 명반들이 대부분 LP라는 점을 감안하면 제대로 된 초판본 마케팅이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초판본 음반의 최대 매력은 소장가치와도 맞물려있다. 책과는 달리 호응이 좋아도 무작정 찍어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현재 국내의 LP생산은 대부분 해외업체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대중음악 명반들을 재발매해온 뮤직리서치의 곽근주 대표는 “CD는 조금만 잘 팔려도 무한정 생산이 가능하지만 LP의 경우에는 해외업체에 의뢰하면 (발매까지) 6개월가량의 시간이 걸린다. 잘 팔려도 바로바로 수요를 맞추기가 어렵기 때문에 한정판매가 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이러다보니 발매 초반에 바로 주문하지 않으면 구입이 어렵다는 인식이 구매자들 사이에 깔려있다는 것이 곽 대표의 설명이다.

소장가치가 커질수록 가격은 천정부지로 뛰는 것은 시장의 당연한 법칙. 때문에 재발매 음반은 구입자의 재테크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안 그래도 LP생산량이 한정적이다 보니 기본가격 자체가 일반 음반에 비해 높은 편이다. 4만원대를 훌쩍 뛰어넘는 경우가 다반사다. 발매수량에 따라 가격은 더욱 높아질 수 있다.

물론 초판본 재발매반이 인기를 끄는 요인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최규성 평론가는 “과거에는 ‘딴따라’라고 불렸던 한국 대중음악이 지금은 ‘케이팝’으로 업그레이드되면서 가치를 재평가 받고 있다. 여기에 복고문화가 맞물려 (옛날음반을) 소장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전했다.

오리지널리티로 진정성 소구

초판본 마케팅은 식품, 주류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인 소비재 산업에서도 쓰이는 전략이다. 오히려 문화산업보다 더욱 의미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 초판본으로 재발매되는 책이나 음반은 예술가의 작품이지만, 기업의 초판본 마케팅은 자사 제품의 역사성을 부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김상률 유나이티드브랜드 대표는 “브랜드에 역사성이 가미되면 신뢰가 뒤따른다. ‘오리지널리티’를 마케팅 툴로 활용해 전통 있는 브랜드라는 점을 각인시킬 수 있다”고 언급했다.

여준상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진정성에 대한 소구가 가능하다”며 “새로운 것을 강조하다보면 제품이 다 비슷비슷해 보이고 과장된 마케팅도 나타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초판본으로 복각된 제품들은 단순한 향수를 떠나 변치 않는 진정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견해를 나타냈다.

   
▲ 지난 2009년 발매된 ‘삼양라면 클래식’과 22년만에 한정판으로 재발매된 ‘크라운 맥주’. 사진=삼양식품, 하이트진로

아울러 “사람들의 마음이 우울하거나 가라앉았을 때는 과거로 돌아가고자 하는 심리가 존재한다”며 “그런 면에서 예전에 히트한 상품을 복각판으로 다시 만나게 되면 기분이 회복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최근에는 사회적으로 단절되고 외로운 사람들이 많은데, 과거 친구나 가족들과 함께 먹고 입었던 복각제품이 추억을 공유하는 매개체가 될 수도 있다는 설명이다.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는 삼양식품이 지난 2009년 판매했던 ‘삼양라면 클래식’이다. 지난 1963년 출시된 삼양라면의 맛을 재현한 제품이다. 오리지널 제품의 맛인 ‘닭고기 국물’을 강화해 진하고 담백하게 만들었다.

이를 위해 과거 자료를 찾는 것은 물론, 당시의 맛을 기억하는 고객을 대상으로 다양한 테스트를 실시했다. 또 발매당시의 ‘노란색’ 무광 포장지 느낌도 살렸다. 다만 이 제품은 지난 2013년 단종됐다.

패션업계에서는 오래전부터 복각제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뉴발란스가 지난 2013년 선보인 ‘990’ 슈즈의 30주년 한정판이 이에 해당된다. 140여년의 역사를 지닌 리바이스와 명품 시계브랜드 태그호이어도 복각판 제품으로 자사 팬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은 케이스다.

지난해에는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히트에 힘입어 당시의 패키지를 재현한 다양한 제품들이 판매되기도 했다. 엄밀히 말하면 초판본이라고 규정지을 수는 없지만 오래된 과거의 제품을 복각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이트진로는 지난해 10월 크라운맥주를 22년 만에 한정판으로 재출시했다. 1952년부터 1993년까지 생산된 제품이다. 크라운맥주의 상징이었던 ‘왕관마크’를 되살리고 1980년대에 생산된 주질에 최대한 가까운 맛을 구현했다는 것이 사측의 설명이다. 롯데제과는 ‘응팔’에 등장했던 자사 제품의 디자인을 그대로 복원해 시장에 출시했다. 빼빼로와 꼬깔콘, 가나초콜릿 등 지금도 판매되는 제품들이 80년대의 옷을 다시 입었다.

감성 제품·특정 시즌 마케팅에 효과적

제품만 복각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국내 스포츠 브랜드 르까프는 1980년대에 온에어했던 광고 2편을 재현해 온라인에 공개했다. 시간이 흘러 모델과 제품은 달라졌지만 광고 속 연기나 카메라워크, 자막폰트 등은 과거의 형식을 그대로 따랐다. 현재의 시각에서 보면 당연히 촌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오히려 재미를 주는 요소로 작용한다.

대웅제약은 자사 대표제품 ‘우루사’의 1997년 광고를 페이스북과 유튜브 등 온라인 채널을 통해 선보였다. 대웅제약 관계자는 “장년층에게는 과거에 대한 향수를 제공하고 젊은 층에게는 복고 트렌드에 맞춰 제품에 대한 관심을 제고하고자 했다”며 “콘셉트나 표현방법이 지금과는 달라 반전의 재미가 있다 보니 네티즌들 사이에서 호감도가 높았고 (긍정적) 효과를 거뒀다”고 설명했다.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높아지는 문화상품과는 달리 소비재의 초판본 혹은 복각 마케팅은 오래가기가 힘들다. 소비시간이 짧고 트렌드가 빠르게 바뀌는 속성 때문이다. 김상률 대표는 “일시적인 향수마케팅일 뿐 지속성을 갖기에는 한계가 있다”며 “특정 시즌과 관련된 마케팅 툴로 활용되는 추세”라고 전했다.

제품군에 따라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김 대표는 “전자제품의 경우에는 별로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과거 소니가 그런 마케팅 전략을 쓴 적이 있는데 고연령층을 타깃으로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젊은 소비자들에게는 맞지 않다”며 “기술적인 제품이냐 감성적인 제품이냐에 따라 결과가 다르다. 감성은 (제품에 대한) 호기심과도 연결된다”고 언급했다.

여준상 교수도 “전자제품의 경우 신기술 적용과 제품 출시주기가 빠른 분야인데 예전의 투박한 디자인을 재현한다면 생뚱맞게 보일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젊은 소비자들에게는 자칫 너무 올드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예전 제품을 사진 찍듯 복원하는데 그치는 것 보다는 리뉴얼화도 다소 필요하다”는 견해를 나타냈다.  

문용필 기자  eugene97@the-p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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