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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甲)질’ 없는 을(乙)미년 꿈꾼다
‘갑(甲)질’ 없는 을(乙)미년 꿈꾼다
  • 박형재 기자 news34567@the-pr.co.kr
  • 승인 2015.02.02 10: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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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로, 불매운동 등 억눌리던 자의 반격…소통의지가 관건

[더피알=박형재 기자] 갑의 횡포에 그동안 숨죽이고 살아온 ‘을’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거나 부당함을 폭로하고 불매운동을 벌이는 등 갑질횡포에 당당히 맞서는 것이다. 인터넷과 SNS를 손에 쥐고 똘똘 뭉친 을의 반격에 기업들도 당황하고 있다. 여론재판에 휘말리지 않으려 눈치보고 조심하는 분위기다. 바야흐로 갑(甲午年)의 시대는 가고, 을(乙未年)의 시대가 오고 있다.

▲ 자료사진. ⓒ뉴시스, kbs 9시뉴스

“귀하께서 오랜 세월동안 견습 월급 10만원, 인턴 월급 30만원, 정직원 110만원과 같은 창의적인 방식으로 패션계에 갓 진입한 청년들의 열정과 노동을 마음껏 착취해 온 점을 높이 평가합니다.”

패션업계는 최근 대표적으로 ‘을의 반란’이 일어난 곳이다. 패션업계 종사자들은 부당한 업무 환경을 개선코자 패션노조를 결성하고, 업계의 ‘갑’인 유명 디자이너들의 노동착취를 폭로했다.

이들은 국내 톱 디자이너들을 후보로 ‘누가 가장 많이 착취했는지’ 패션계 종사자들에게 페이스북 투표를 진행해 디자이너 이상봉 씨를 ‘2014년 청년착취대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이 씨는 야근수당을 포함한 월급으로 견습 10만원, 인턴 30만원, 정직원은 110만원을 지급해 ‘열정페이’ 논란에 휩싸였다. 열정페이란 갑이 을에게 “일 자체가 경험이니 적은 월급이라도 불평하지 말라”는 태도를 보이는 것을 비꼬는 말이다.

<한겨레신문> 보도에 따르면, 열정페이 문제를 제기해 온 청년 대표들과 디자이너연합회는 지난 1월 29일 처음으로 만나 서로 간 입장을 나누며 상생방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소셜커머스 업체 위메프는 신입사원 11명을 채용해 2주의 수습 기간 동안 하루 최대 14시간에 달하는 강도 높은 업무를 시킨 뒤 “합격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며 전원 해고시켜 공분을 샀다.

이후 ‘채용갑질’ 논란이 일자 뒤늦게 11명 모두를 합격시켰지만 여론은 가라앉지 않았고 불매운동마저 벌어졌다. ▷관련기사 바로가기 갑질 논란 직후 위메프는 매출과 트래픽이 25% 가량 감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 엔제리너스커피는 고객의 말투에 따라 커피값을 깎아주는 ‘따뜻한 말 한마디’ 이벤트를 통해 우회적으로 을의 반란에 합류했다.

엔제리너스커피는 고객의 말투에 따라 커피값을 깎아주는 ‘따뜻한 말 한마디’ 이벤트를 통해 우회적으로 을의 반란에 합류했다. ▷관련기사 바로가기

매월 첫째 수요일마다 고객이 “아메리카노 한 잔” 하고 주문하면 제값을 받고,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하면 가격을 20% 깎아준다. 종업원 이름을 불러주며 정중히 주문하면 50%나 할인해준다. 하지만 반말을 하거나 불친절하게 주문을 할 경우에는 50% 할증이 붙는다.

을의 반란은 이뿐만이 아니다. 사회 곳곳에서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아르바이트 노동조합은 알바생들의 임금체불이나 부당해고 피해에 각종 상담을 도맡으며 반격의 선봉에 섰다. 이들은 알바의 사각지대로 불리는 ‘꺾기 관행’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꺾기란 맥도날드 등 매장에서 손님 없는 시간에 알바생을 강제로 조퇴시킨 뒤 그 시간만큼 임금을 안주는 것이다.

갑질로 이미지 추락, 매출에 직격탄

대한항공은 ‘땅콩회항’ 논란의 여파로 지난해 12월 국내선 여객이 전년 같은 기간보다 6.6% 줄었다. 다른 국내 6개 항공사의 여객이 10∼40%가량 증가했지만 대한항공만 유일하게 감소했다. 국제선은 상대적으로 타격이 작았지만 권위적인 이미지를 쇄신하지 못하면 결국 승객들에게 외면당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관련기사: ‘비행(非行)’이 돼버린 ‘비행(飛行)’, 누구 책임인가?

스크린골프 시장 점유율 1위인 골프존은 최근 갑의 횡포를 일삼다 매서운 을의 반격을 당했다. 스크린골프를 구입해준 업주를 상대로 거의 착취에 가까운 영업을 하던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골프존 최신장비 1대 가격은 6100만원인데 이중 영업이익이 40%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난 스크린골프 업주 1000여명은 “생존권을 보장해달라”며 결의대회를 열었고 골프존은 언론과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지난 2013년 영업사원의 대리점주 욕설 파문으로 갑을논란의 시작을 알린 남양유업은 ‘갑질파문’ 전만 해도 시가총액 8000억원이 넘었다. 하지만 지난달 26일 기준 시가총액은 4997억원까지 쪼그라들었다. ▷관련기사: 매출 ‘뚝’…남양유업 위기관리, 무엇이 문제였나?

▲ 사회적으로 갑을관계를 재조명하고 상대적 약자인 을들을 주목하는 시선도 생겨나고 있다.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을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미생’(위), 대형마트 계약직 여성 근로자들이 부당해고에 맞서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 ‘카트’의 한 장면.

사회적으로 갑을관계를 재조명하고 상대적 약자인 을들을 주목하는 시선도 생겨나고 있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미생>은 케이블 방송임에도 8.2%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동명의 웹툰이 원작인 이 드라마는 정규직이 될 수 없는 계약직 사원 장그래, ‘사내 정치’를 못해 주류에서 밀려난 오상식 차장을 통해 직장 내 을의 입장을 대변했다. ▷관련기사: 시대는 왜 ‘직장인’에 주목하나

지난해 11월 개봉한 영화 <카트>는 비정규직 문제를 다룬 국내 최초의 상업영화다. 단체로 해고된 대형마트 계약직 여성 근로자들이 부당해고에 맞서는 이야기를 그렸다. 누적 관람객 수 80만명을 넘어서며 무거운 메시지를 던졌다.

을들의 공감과 연대, 분노와 반격

그동안 참고 견디던 을들이 왜 요즘 들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걸까. 전문가들은 이 같은 현상에 일정한 흐름이 있다고 분석한다. 을들의 ‘공감과 연대’, ‘분노와 반격’이다.

김찬호 성공회대 교양학부 초빙교수는 을의 반격에 대해 “탈출구가 사라진 약자들이 현실을 자각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이라고 진단했다. 김 교수는 <모멸감-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이라는 책을 쓴 사회학자다.

고도성장기에는 굴욕적인 일을 겪어도 ‘나도 돈 벌어서 성공하겠다’는 생각에 애써 현실을 부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신분상승 가능성이 없어지면서 약자들이 스스로 현실을 바꿔야겠다는 의식이 확산됐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이 사라지면서 을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최근 갑을관계의 변화는 갑작스러운 게 아니다. 새로운 사회현상은 그동안 차곡차곡 쌓인 불만의토양 위에 변화가 싹트는 것”이라며 “사실 예전부터 터져야 할 것이 뒤늦게 불거진 감이 있다. 오히려 그동안 왜 갑을논란이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는지 짚어보고
반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을의 반란은 사회적 약자들의 공감과 연대가 분노로 표출되는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갑을 논란에 휘말린 을의 상황은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만큼 공감대를 형성하고 갑에게 저항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직장인 10명 중 9명은 갑에게 부당한 대우를 당한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취업포털 사람인이 직장인 796명을 대상으로 ‘직장생활 중 갑에게 부당한 대우를 당한 경험’을 조사한 결과, 89.9%가 ‘있다’고 답했다. 이들은 ‘시도 때도 없는 업무 요청’과 ‘의견묵살’, ‘욕설 등 인격모독’, ‘업무실적 빼앗김’ 등을 당했으나 절반 이상(51.1%)이 이의제기 등 불만을 표현하지 않았다. 괜히 일이 커지거나 불이익이 돌아올까 참고 넘긴 것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인터넷의 발달이 갑을관계 변화에 기폭제가 됐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논란이 된 갑질 사건들은 공통적으로 SNS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고 인터넷에 의해 확산됐다. 예전에는 을이 갑의 부당 행위를 세상에 알릴 길이 제한적이었지만 지금은 SNS에 올라가면 순식간에 퍼져나간다. 갑이 사실을 은폐하거나 호도하려고 시도할 경우 대중의 공분을 불러일으켜 사태를 악화시킨다. 갑의 조직이나 권력이 스마트폰과 SNS로 무장한 을의 입을 막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정준영 청년유니온 정책국장은 “SNS의 발달로 을의 목소리가 확산되기 좋은 환경이 형성됐다. 을들이 커뮤니티에서 서로 의견을 나누고, 링크를 걸고, 퍼가는 등 이슈가 생기면 확대 재생산되는 속도가 굉장히 빨라졌다”고 말했다.

사회적 분위기의 변화도 을의 반란에 힘을 싣는 요소다. 예전에는 갑질이 권력과 부의 상징으로 인정받던 시절이 있었다. 벼락출세한 사람일수록 남에게 과시하기 위해 갑질을 하고, 권위주의 시대에서는 을이 갑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제재가 들어왔다. 이제는 반대로 갑이 횡포를 부리면 사회 질서를 훼손하는 행위로 비난받는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저서 <갑과 을의 나라>에서 “과거 갑질을 정당화하는 대표적인 말이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슬로건이었다. 압축 성장의 시대를 건너면서 출세하지 않으면 억울한 일을 당하는 갑을 관계의 착취가 진행됐다”며 “그러나 갑질을 생생히 고발할 수 있는 인터넷과 각종 녹음, 촬영기술의 발달이 ‘밀실의 광장화’를 만들고, 갑질을 효과적으로 고발하는 데 쓰이고 있다”고 진단했다.

▲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은 일명 ‘땅콩회항’ 사건으로 갑질 논란의 불씨를 당겼다. ⓒ뉴시스

여론재판 소나기 피하려면

을의 반격은 우리 사회의 쏠림현상을 바로잡아준다는 면에서 바람직하다. 그러나 기업에겐 여간 껄끄러운 게 아니다. 기업 입장에서 갑을 논란을 피하고 여론재판에 휩쓸리지 않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갑을 논란의 해법은 의외로 간단하다고 말한다. 을과 함께 정한 원칙, 정해진 법규를 제대로 지키는 것이다.김찬호 교수는 “기업이 갑을 논란에 휘말리지 않는 것은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게 아니다. 을과의 관계에서 정해진 원칙대로만 지켜나가면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수단과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혜정 아르바이트 노동조합 사무국장은 “사장과 직원은 각각 돈과 노동력을 제공하는 동등한 관계인데 이를 착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며 “갑을논란은 을들이 스스로 권리를 조금씩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분석했다.

정준영 청년유니온 정책국장은 “갑을논란의 해법은 ‘법을 지키면 된다’가 기본이다. 기업이 법을 잘 안 지키니 문제가 생긴다”면서 “기업 내부적으로 조직문화 개선과 혁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을들의 자기 권리 바로알기도 중요하다. 불합리한 상황에 처했을 때 자기 탓으로 돌리고 참고 견디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대응할지 몰라 정당한 권리를 챙기지 못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본래 ‘갑과 을은 계약서를 쓸 때 계약 당사자를 순서대로 지칭하는 법률 용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상하관계나 주종관계로 왜곡돼 있다.

전문가들은 올바른 갑을 문화의 해법은 거창한 국가정책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보복도 아닌 서로에 대한 배려, 역지사지하는 마음이라고 강조한다. 갑을관계는 영원불변이 아니며, 경우에 따라 모두다 갑이나 을이 될 수 있는 만큼 상대방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하는 소통의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김찬호 교수는 “앞으로도 갑을논란은 더 많아질 것이다. 사회적으로 자꾸 갈등과 진통이 생기는 것에 불편해하는 시각도 있겠지만, 건강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성장통이라고 생각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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