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피알=황부영 | 사람들에게 도시는 숙명이었다. 태어난 장소를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브랜드와 브랜딩이 도시에도 중요해진 것은 사람들이 도시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도시는 숙명과도 같은 곳이 아니다.
선택을 받아야 하는 도시의 입장에선 경쟁이 치열해졌다는 뜻이 된다. 경쟁이 치열해지면 결국 브랜드와 브랜딩이 승부를 결정한다. 브랜드는 사람들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 연상 등의 집합체다. 브랜딩은 이름 짓고, 디자인하고, 슬로건을 만드는 작업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요즘에는 목표 인식을 잘 떠오르게 하려는 모든 작업을 브랜딩이라고 한다. 브랜딩을 잘하는 방법은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와서 보니, 살아보니 정말 그렇다’라고 반응하게 하는 것, 직접 경험이다.
가보지 않았어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경험하는 것은 간접 경험이다. 브랜딩의 핵심은 경험이다. 궁극적인 브랜딩은 언행일치다. 간접 경험을 만들고 직접 경험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 슬로건이다.
브랜딩은 언행일치다
유명한 도시 브랜드 슬로건에서 시장이 연상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베를린은 시장과 함께 기억된다.
재작년 9월 치러진 독일 총선의 승자는 사회민주당(SPD)이었다. 그 유명한 빌리 브란트(Willy Brandt)가 사민당 소속이었다.
베를린의 브랜딩을 시작한 클라우스 보베라이트(Klaus Wowereit) 시장도 사민당 소속이었다. 그는 2001년 47세의 나이에 시장이 되었고, 그로부터 13년 동안 베를린 시장으로 일했다. 그는 동성애자다.
시장이 되기 전 커밍아웃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동성애자입니다. 그건 그런대로 괜찮아요(Ich bin schwul-und das ist auch gut so!)”라고. 이 말은 그의 이미지를 더 긍정적으로 만들었다.
독일 사람들에게 나치는 떨쳐내기 어려운 원죄와도 같다. 나치즘의 전성기, 베를린은 그 본거지였다.
나치는 유대인뿐 아니라 동성애자들도 학살했다. 자손 번식도 안 하는 집단이란 것이 이유였다. 그래서 수용소에 가뒀고 또 죽였다. 야만이었다. 이런 역사적 맥락과 맞물려 그는 젊고 개혁적이며, 약자와 소수자를 보듬을 수 있는 인물로 급속도로 부각되었다.
무엇을 왜 고민했을까?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보베라이트 시장은 실체를 인정하는 것으로 브랜딩에 나섰다. 현재 베를린은 혁신의 도시, 창업의 도시, 예술의 도시 등 새로운 생각이 끊임없이 쏟아져나오는 젊은 도시로 유명하다.
독일 내에서 외국인 비중이 가장 높은 도시이기도 하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도시 브랜딩을 고민하던 시기의 베를린은 암울했다.
성장률은 계속 하락하고 있었고, 2003년 기준 일자리 수도 역대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었다. 기존 서베를린과 동베를린 시민들 사이의 갈등도 컸다.
변화의 모멘텀은 2003년 보베라이트 시장이 세상에 던진 한마디에서 시작됐다. ‘Poor but Sexy’, 이 세 단어는 실체를 인정하되 지향 방향을 선언하는 베를린이라는 도시 브랜드의 출사표였다.
‘Poor but Sexy’는 베를린의 공식적인 슬로건은 아니다. Sexy는 ‘젊은, 창의적인, 예술적인, 새로운’의 의미였다.
‘젊은, 창의적인, 예술적인, 새로운’ 이미지를 지향하는 기업이나 도시는 사실 흔하다. 베를린이 달랐던 것은 ‘Sexy’를 선포한 이상 그에 걸맞은 실체가 반드시 존재하도록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오래전 파리가 그랬듯 베를린은 낮은 집세와 물가를 활용하여 전국, 전 유럽, 전 세계의 ‘새로운 생각’을 가진 ‘Poor but Sexy Guy’들을 불러들였다.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 덴마크의 미술가)이나 더글러스 고든(Douglas Gordon, 영국의 설치미술가·비디오 아티스트)처럼 독일 사람이 아니면서도 베를린에 머물며 역사를 만들어간 예술가는 수없이 많다.
베를린은 새로운 생각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든 도시에 머물며 작업이나 창업을 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2009년 개장한 베타하우스와 팩토리 베를린, 더플레이스 등 창업자를 위해 베를린은 아낌없이 공간을 제공한다. 베를린이 ‘스타트업 아우토반’이라 불리는 이유다.
‘Poor but Sexy’는 대성공을 거뒀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베를린이 ‘Poor but Sexy’한 이유를 찾아냈다.
2013년 카차 아반타드(Katza Avant-hard)라는 아티스트가 만든 인포그래픽(아래)이 대표적이다.

Be Berlin 캠페인
내세울 것이 없었던 과거와 달리, 실체의 보강과 더불어 주민들의 긍정적 인식을 얻은 베를린은 브랜드 캠페인을 확장했다.
보베라이트 시장은 “우리는 변화의 도시 베를린으로 출발하여 기회의 도시 베를린에 이르렀다”는 선언과 함께 ‘Be Berlin’ 캠페인을 시작했다. 2008년의 일이다. 참여형으로 설계된 캠페인은 ‘Be ___ , Be ___ , Be Berlin!’이라는 가변형 슬로건을 채우는 형식이었다.
슬로건이자 캠페인 명인 ‘Be Berlin’은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이 1963년 서베를린을 방문해서 남긴 연설문의 ‘나는 베를린 사람이다’(Ich bin ein Berliner)라는 구절에서 차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1963년 베를린을 방문한 케네디는 100만 명이 넘는 베를린 시민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2000년 전 가장 훌륭한 자랑거리는 ‘나는 로마 시민이다’(Civis Romanus Sum)였습니다. 이제 자유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자랑거리는 ‘나는 베를린 시민이다’(Ich bin ein Berliner)입니다.”

캠페인이 시작되자 다양한 구성원들, 새로운 이주자들이 각자 자신만의 베를린을 함께 채워나갔다. Be Berlin 캠페인도 큰 성공을 거뒀다.
‘Poor but Sexy’를 선언한 지 17년, ‘Be Berlin’ 캠페인을 시작한 지 12년이 지난 2020년, 베를린은 새로운 도시 브랜딩을 시작했다. 오랜 시간이 지났고 시장도 바뀌었지만 베를린은 캠페인의 통일성을 유지했다.
‘우리는 베를린이다’(WIR SIN DEIN BERLIN)가 새로운 슬로건으로 도입됐다. 이제 베를린은 스스로 ‘섹시하다’고 설명할 필요도, 베를린을 어떻게든 정의(Be Berlin)하자고 제안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이것이 성공한 브랜드가 갖는 힘이다.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지만 완성된 후에는 스스로 동력을 갖고 움직이는 플라이휠(Fly-Wheel)이 되는 것이다. 베를린은 더 이상 ‘Sexy’를 말하지 않지만, 그 어느 곳보다 Sexy한 도시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