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피알=한민철 기자 ㅣ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배우자인 노소영 아트센터나비 관장과의 이혼 소송의 상고 제기를 앞두고, 원심 재판부의 판결을 적극적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최 회장과 변호인단은 지난 17일 서울 서린동 SK서린빌딩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사실상 패소한 노 관장과의 이혼 소송 항소심 판결 내용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우선 SK 측은 최 회장과 노 관장의 이혼 소송 항소심 판결문 중, ‘SK가 6공화국 당시 사돈인 노태우 대통령의 뒷배로 성장했다’라는 쟁점에 대해 과거 실제 있었던 사실을 근거로 들어 반박해나갔다.
이는 그동안의 재판에서 최 회장에 불리하게 작용했고, 그와 SK를 향한 여론의 비난을 부추긴 쟁점 중 하나였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이형희 SK수펙스추구협의회 커뮤니케이션위원장은 “6공과의 사돈이라는 인연이 그다음 YS(김영삼) 정부로도 이어져, (SK의) 한국이동통신 인수에도 많은 도움이 됐다거나 SK가 지속적으로 성장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며, 판결문에 그러한 취지로 적시가 돼 있다”라며 “6공 시기에 특혜를 받은 것 과연 있을까, 저는 생각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SK 측은 6공화국 기간(1987년~1992년) 당시 국내 10대 그룹의 매출 성장률을 제시했다. 1987년 당시 SK(선경)의 연간 매출액은 약 5.3조 원으로 삼성(13.6조)과 현대(11.9조), LG(9.2조), 대우(7.2조) 다음이었다.
그런데 노태우 정권 말기인 1992년에 가면 대우(31.2조)와 현대(29.9조), LG(18.9조)가 폭발적인 매출 성장을 이뤘다. 당시 SK의 매출액(9.4조)은 삼성(13.4조)에 이어 여전히 5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매출 성장률로 본다면 대우(4.3배), 기아(3.9배), 롯데(2.7배), 현대(2.5배), 쌍용(2.4배), 한진(2.1배), LG(2.1배)에 이어 한화와 같은 1.8배 수준이었다.

노태우 정권 초기 SK의 매출액은 대우와 비슷한 수준이었지만, 말기로 향하자 범접할 수 없을 정도의 수준으로 차이가 벌어진 것이다. 만약 사돈인 노 대통령의 뒷배가 있었다면, SK의 매출과 성장률이 이처럼 애매하지도 않았다는 설명이다.
이동통신사 사업권, ‘盧 대통령 같은 편’ 압박에 자진 반납
노태우 정부의 특혜 아래 SK텔레콤 설립의 토대가 됐다며 ‘세간의 오해’를 사고 있는 제2 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에 대해서도 SK 측은 적극적으로 항변했다.
사실 노태우 정부 말기인 1992년 선경이 제2 이통통신 사업자로 선정되자 정치권을 중심으로 ‘이동통신 파문’으로 불리는 잡음이 일었다.
노 대통령의 소속 정당인 민주자유당(민자당) 내부에서마저 해당 논란에 대한 의견이 갈렸고, 김영삼 당시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을 중심으로 “선경이 자진해 사업권을 반납하고, 사업자 선정을 재고해야 한다”라는 말이 나왔다.
1992년 8월 24일 자 <연합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이날 김영삼 당시 대표최고위원은 노 대통령과 회동 뒤 기자들에 “금일 오전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을 2시간가량 만나, 나라를 위하고 경제·사회적 측면에서도 선경이 빠른 시일 내에 결단을 내리는 게 좋으며, 그 시기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나의 분명한 입장을 밝혔다”라고 말하며, 선경 측에 제2 이동통신 사업권 반납을 강하게 종용했다.
대통령의 사돈 기업이 특혜를 입게 됐다는 비판이 거세지자, 노 대통령과 ‘같은 편’인 민자당마저 이를 옹호하지 않고 사업권 자진 반납을 촉구한 것이다. 결국 최종현 당시 선경 회장은 이통통신 사업권을 반납했고, 백지화된 사업은 차기 정부에서 재추진됐다.
김영삼 정부 2년 차인 1994년 1월, SK는 한국이동통신 지분 인수에 대한 입찰에 참가, 입찰 신청자만 총 292건(선경그룹은 3개 사가 참가)에 달했던 높은 경쟁을 뚫고 겨우 인수에 성공했다.
당시 주당 8만 원에 불과했던 회사 주식을 무려 33만 5000원, 총액 약 4271억 원에 사들인 것이다. 당시 언론에서는 개인 입찰자만 주당 15~20만 원 선에서 응찰했다는 소식이 나왔는데, 실제 다른 입찰 참가자들이 제시한 금액의 평균은 18만 7400원에 불과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형희 위원장은 기자회견에서 “낙찰받지 못한 다른 입찰자의 입찰가와 비교해 보면, 약 15만 원의 차이가 난다”라며 “거의 2배가 넘는 금액을 넣고 인수했는데, 과연 특혜라고 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SK의 6공 특혜설, 해묵은 가짜뉴스”
이처럼 6공 시기 SK가 비약적 성장을 이뤘다고 볼 수 없는데, 다음 김영삼 정부 시기까지 6공의 특혜가 지속적 성장으로 이어졌다고는 더더욱 보기 힘들 것이다.
역사적 사실이 말해주고 있지만, 김영삼 정부 시기는 5공 청산의 일환으로 과거 정부 인사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와 정치적 압박이 이어졌다. 물론 노태우 대통령의 비자금 관련 사건에 대한 수사는 1995년부터 이뤄졌지만, 김영삼 정권은 취임 1년 차부터 SK에 대한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1993년 6월 공정거래위원회는 재벌그룹에 대한 내부거래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선경그룹 계열사(㈜선경, 유공, 선경인더스트리)에 대한 조사를 벌였다.
노 대통령의 비자금 의혹 사건이 촉발한 1995년에는 SK에 대한 정부의 압박이 더욱 거세졌다. 그해 3월 공정위는 선경그룹 4개 계열사의 부당 내부거래와 불법 하도급 행위로 인한 법 위반 사례를 발견했다고 밝히며, 유공과 조규향 당시 유공 사장이 검찰에 고발됐다. 나머지 계열사는 과징금과 시정명령, 경고 조치 등을 받았다.
특히 이들 계열사의 부당 내부거래와 하도급법 위반 사실이 국세청에 통보됐는데, 곧바로 국세청이 선경건설에 대해 10년 만의 세무조사에 돌입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노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으로, 최종현 회장 등 SK 관계자들이 검찰의 강도 높은 수사를 받아야만 했다.

당시 검찰은 최종현 회장에 선경의 태평양 증권 인수 경위를 비롯해 6공 당시 특혜와 이권 개입에 관해 철저한 조사를 벌였다. 하지만 이로 인해 최 회장을 비롯해 SK 관계자가 기소된 적도 없었다.
이에 최태원 회장과 노소영 관장과의 이혼 소송에서 쟁점이 되는 ‘SK의 6공 특혜설’은 결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형희 위원장은 기자회견에서 “SK는 6공 특혜로 성장한 기업이 절대로 아니며, 6공 특혜설은 해묵은 가짜 뉴스”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