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한국 광고에는 사회적 메시지가 없을까
왜 한국 광고에는 사회적 메시지가 없을까
  • 문용필 기자 (eugene97@the-pr.co.kr)
  • 승인 2019.03.2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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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신장, 인종차별 등 소재로 자유롭게 표현
국내선 ‘힐링’ ‘위로’ 간접화법…쟁점 정치적 잣대로 재단하는 풍토 한몫
미국에서 선보인 질레트 광고 한 장면. 사회적 메시지를 직설적으로 던지는 서구권에 비해 한국에서는 그런 형태의 상업광고를 보기 어렵다. (*클릭시 해당 영상이 공유된 유튜브 페이지로 연결됩니다)

비키니를 입은 댄서가 춤을 추는 뮤직비디오를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여성을 희롱하는 내용이 담긴 코미디에 폭소를 터뜨린다. 땅바닥을 뒹굴며 싸우는 아이들을 보면서 말리기는커녕 “남자애들은 역시 남자애들이지”라며 수수방관할 뿐이다.

[더피알=문용필 기자] 지난 1월 미국에서 등장한 한 광고에 삽입된 장면들이다. 마초 근성에 젖어있고 젠더 감수성에 둔감한 남성들의 작태를 꼬집은 것이다.

해당 광고는 이후 “Men need to hold other men accountable(남성들은 다른 남성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며 위 상황과 반대되는 사례들을 보여준다. 여성을 ’길거리 헌팅’하려는 다른 남성을 말리고 집단 구타를 당하는 청소년을 구하는 모습 등이다.

뭇 남성들에 대한 비판 메시지가 짙게 깔린 이 광고를 제작한 기업은 다름 아닌 질레트다. 수십 년간 남성 면도기를 판매하면서 글로벌 브랜드 반열에 올랐고, 업의 특성상 남성성을 강조한 광고를 선보일 수밖에 없었던 질레트가 이제는 남성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The best a man can get(남자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것)’이라는 기존 슬로건 대신 ‘We believe: The best men can be(우리는 믿는다:당신이 될 수 있는 최고의 남성)’라는 새로운 가치를 내건 것도 질레트의 변화 중 하나다.

질레트의 새 광고는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유튜브에 올라온 영상에 무려 145만 건이 넘는 ‘싫어요’가 붙었다. 자칫 남성 전체를 매도한 것으로 비쳐질 수 있는 광고 내용 때문이다. 한 남성 네티즌은 댓글을 통해 “질레트 제품을 다시는 안 살 것”이라며 “평생 고객을 잃은 것”이라고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반면 호의를 표한 네티즌은 그 절반가량인 78만여명에 머물렀다.

질레트가 광고를 제작하면서 이런 역풍을 예상 못하지는 않았을 터. 하지만 미투(me too)를 위시한 여성들의 권리 찾기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대표적인 남성 브랜드가 통념을 깨는 용감한 시도에 나섰다는 점은 높게 평가할 만하다.

재미있는 것은 질레트 광고에 ‘반기’를 든 또 다른 회사의 광고가 나왔다는 점이다. 시계 브랜드 에가드는 ‘What is a man?(남자란 무엇인가?)’라는 이름의 광고에서 ‘질레트에 대한 답변’이라고 대놓고 이야기하고 있다.

광고에서는 화재 현장에서 일하는 소방관, 아이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군인, 갱도에서 작업 중인 광부 등 ‘좋은 남성’의 이미지들을 그려냈다. 아울러 직장 사망자 중 93%, 살인 피해자의 79%가 남성이라는 데이터를 언급하면서 ‘남자의 고된 삶’을 부각시켰다. 마지막 카피도 인상적이다 ‘We see the good in men(우리는 남성들의 좋은 면을 본다)’며 질레트에 대한 ‘디스 광고’임을 각인시켰다.

소비자 믿고 가는 과감성

글로벌 숙박 공유 플랫폼 업체인 에어비앤비는 지난해 광고에 “We believe no matter who you are, where are you from, who you love, or who you worship(우리는 당신이 누구든, 어디서 왔든, 누구를 사랑하든, 누구를 섬기든 상관없이 믿는다)”는 카피를 삽입했다. 인종과 국적, 성 정체성, 종교 등 각종 차별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영상광고는 아니지만 지난 2017년 투자자문회사인 스테이트 스트리트 글로벌 어드바이저(SSGS)가 선보였던 ‘The fearless Girl(겁 없는 소녀)’ 캠페인도 크게 화제가 됐다. 뉴욕 월스트리트의 명물이자 남성성을 상징하는 황소상 맞은편에 여성평등을 상징하는 소녀상을 세웠다. 황소의 위세에 맞서는 듯한 소녀의 포즈는 당당하다. 이 캠페인은 그해 칸 국제광고제 옥외 부문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할 만큼 주목을 받았다.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인 나이키는 자사 슬로건인 ‘Just do it’을 내걸고 스포츠를 통한 도전정신을 강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지난해 내놓은 캠페인 30주년 광고에 논란의 인물을 과감하게 내세워 다시 한 번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미국 프로풋볼(NFL) 선수인 콜린 캐퍼닉이 그 주인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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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퍼닉은 백인 경찰의 흑인 사살 사건에 항의하는 의미로 지난 2016년 경기에서 미국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무릎을 꿇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를 광고에 출연시킨 것은 나이키가 그의 생각에 공감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 대목. 전형적인 백인 보수주의자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트위터를 통해 “What was Nike thinking?(나이키는 무슨 생각을 했지?)”라고 비판할 만큼 파급력이 대단했다.

미국 등 서구사회에서 사회적 이슈를 과감히 녹여내는 시도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담배회사인 필립모리스는 1968년 여성용으로 만든 버지니아 슬림을 내놓으며 ‘You’ve Come Long Way, Baby(먼 길을 왔네요)’라는 카피를 사용한 바 있다. 오랜 세월 성차별에 눌려왔던 여성의 마음을 달래준 문구였다.

물론 오랜 역사만으로 해외의 사회적 광고를 설명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김여정 홍익대 광고홍보학부 교수는 “(글로벌 기업들은) 워낙 시장이 크기 때문에 광고로 인해 비판 받더라도 이를 차별화 포인트로 삼는다”며 “우리의 포지셔닝을 믿고 지지하는 일부 소비자들을 믿고 간다는 전략적 선택이 있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박현우 이노레드 대표는 “결국 어느 정도 (사회적) 민주화가 이뤄지고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 올라와 있느냐에 따라 광고의 수용도는 다르다”며 “(사회적 광고 관련) 좋은 사례들은 미국이나 서유럽 등에서 많이 보이는데 일본이나 중국만 해도 이런 케이스가 많지는 않다”고 전했다.

이명천 중앙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서구사회, 특히 미국의 경우는 출발단계부터 다민족 국가였고 유럽은 2차 대전 이전에는 울타리가 없던 사회였다”며 “멜팅 팟(Melting Pot)이 빨리 이뤄졌기 때문에 사회 이슈를 다룬 광고도 빨리 나타날 수 있었다”고 언급했다.

조재영 청운대 광고홍보학과 교수는 “미국은 의견 형성이 자유롭다”며 “자신의 의견과는 다르지만 (멋진) 광고는 잘 만들었다고 보는 성숙된 자유주의가 존재한다”고 배경을 설명하기도 했다.

국내선 ‘힐링’ ‘위로’ 간접화법 구사

광고의 사회 참여와 관련해 국내로 시선을 돌려보면 이야기는 좀 달라진다. TV와 온라인, 신문·잡지 지면 등 광고는 넘쳐나지만 민감한 사회적 이슈를 다룬 상업광고는 거의 없다시피 하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청년실업이나 소외계층, 자살문제 등을 터치한 기업광고나 캠페인은 존재한다. 그러나 해외 광고의 접근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해당 문제에 대한 자사의 견해를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고 비판적 메시지를 던지기보다 ‘힐링’이나 ‘위로’의 방식으로 다가간다. 사회적 가치를 제시하는 캠페인도 일부 있지만 긍부정과 호불호가 갈리는 이슈와는 다소 거리가 먼 CSR 차원의 이야기다.

앞서 소개한 질레트와 에가드의 사례처럼 특정 사회 이슈를 놓고 공방을 벌이는 기업 간의 광고는 언감생심이다. 라이벌 업체를 비판하는 것도 조심스럽거니와 광고에서 보여주는 제품 비교도 자사의 타제품을 사용하는 관행이 불문율처럼 자리 잡고 있다. 콜린 캐퍼닉처럼 이슈의 중심에 선 인물을 국내 상업광고에서 만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사회적 메시지를 직설적으로 던지는 서구권에 비해 한국에서는 그러한 형태의 상업광고를 보기 어렵다.
사회적 가치를 얘기하는 기업 캠페인도 긍부정이 갈리는 이슈는 빼고 자사의 CSR 활동을 보여주는 데 그친다.

물론 ‘공익광고’라는 이름으로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광고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정부부처나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일부 방송사들이 진행하는 형태다. 그마저도 계몽적 색채가 짙어 파급력을 일으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수십 년간 이어져 온 이같은 공익광고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저조하다.

광고심의 전문가인 조재영 교수는 “사회적 이슈를 다뤘다고 해서 (광고심의 규정이나 광고 관련법 상에) 별도 규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고 했다. 그런데도 국내에서 사회적 쟁점을 다룬 상업광고를 보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요소는 광고주의 ‘몸 사리기’다.

조 교수는 “사회적 이슈를 다뤘다가 브랜드 이미지가 나빠지거나 충성고객들이 등을 돌릴 수 있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을 것”이라며 “광고주의 의도를 담는다면 찬반 입장이 존재할 텐데 만약 (특정 이슈에 대한) 광고주 생각이 ‘반대’라면 ‘찬성’ 입장에 있는 소비자들의 반발을 살 수 있다. 결국 다루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니 두려운 것”이라고 봤다.

파급력이 있는 쟁점들을 정치적 잣대로 재단해버리는 한국의 사회 풍토는 광고주들을 더욱 움츠리게 만든다.

박재항 하바스코리아 전략부문 대표는 “국내에서는 어떤 이슈건 보수냐 진보냐로 편 가르기가 심하다. 기업들이 엮여 들어가면 한쪽 성향의 소비자들을 막아버리는 셈이 된다”며 “조금이라도빌미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방어적인 태도가 강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한 “역사적인 경험에서 보면 정부 입김이 법제적 측면뿐만 아니라 (다른 부분에서도) 세게 작용했기 때문에 기업이 눈치를 본다”며 “여기에 최근에는 온라인상에서 여론이 빠르게 변화하기 때문에 (광고에) 사회적 이슈를 담아내는 것이 더욱 어렵게 됐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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