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딩을 공모전 쯤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다, 그것도 많다
비딩을 공모전 쯤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다, 그것도 많다
  • 강미혜 기자 (myqwan@the-pr.co.kr)
  • 승인 2019.07.23 09:0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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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요청서에 탈락업체 아이디어까지 요구
‘리젝션 피’는 언감생심, 민간-공공 분야 막론 관행적 갑질 여전
입찰제안서를 위해 들어가는 인력과 시간에 대한 비용이 전혀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더피알=강미혜 기자] 아이디어를 파는 에이전시에게 제안서는 전쟁터에서 이기기 위한 비장의 무기와 같다. 잠재 클라이언트(고객사)를 대상으로 자사 경쟁력을 드러내고 타사 대비 우수성을 어필하는 ‘킬러 콘텐츠’가 집약돼 있다.

그런데 이 무기를 별다른 대가 없이 넘기라고 요구하는 곳이 있다. 계약관계에 의해 갑의 위치에 서게 되는 클라이언트가 그들로, 아이디어 값을 비딩(bidding)에 참여하는 조건과 맞바꾸곤 한다. 에이전시를 일감 주는 ‘을’로 여기며 관행적으로 해오는 일종의 ‘갑질’이다.

얼마 전 A광고회사 대표는 황당한 내용이 포함된 제안요청서(RFP)를 받았다. 입찰을 위한 경쟁 프레젠테이션(PT)에 참여해 달라는 것인데, 참여한 모든 업체에 제안서 권리를 클라이언트에 귀속한다는 단서가 붙었다.

해당 입찰을 따내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조건이다. 하지만 떨어지는 업체 입장에선 비딩을 준비하는 과정에서의 인력과 시간 투입에 대한 아무런 보상 없이 아이디어까지 헌납하게 되는 셈이다.

A사 대표는 “제안에 참여한 업체 아이디어를 사용하려면 비용을 지불하거나 최소 동의를 구하는 것이 맞다”면서도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며 씁쓸해했다.

광고뿐만 아니라 PR과 마케팅 등 무형의 서비스를 파는 에이전시에게 이같은 상황은 전혀 새삼스러울 게 없는 이야기다. 몇몇 대기업에선 경쟁PT에서 떨어진 업체들에 리젝션 피(rejection fee·탈락보상금)를 지급하기도 하지만 해외와 달리 국내는 여전히 극소수다. 

대학생 대상 공모전 등 아마추어들의 재능을 겨루는 경쟁이라면 몰라도 시간이 곧 돈이 되는 프로들의 세계에선 납득하기 힘든 구악에 해당된다.  

B회사 대표는 “이(커뮤니케이션) 업계는 지식재산권에 대한 개념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면서 “RFP에 아이디어를 귀속한다고 명시해 놓으면 그나마 양반이다. 떨어진 업체 아이디어를 교묘하게 믹스(mix)해서 쓰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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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온-오프라인을 넘나드는 대형 프로젝트에선 PT 준비에 공이 훨씬 더 들어간다. 클라이언트를 설득하려면 페이퍼워크(paper work) 정도가 아니라, 현란한 비주얼 작업은 물론 프로토타입(시제품)으로 유형의 결과물을 미리 제작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경쟁PT에 참여해 소위 ‘레퍼런스’를 확보하려면 작지 않은 손해를 감수해야만 한다.

민간뿐만 아니라 공공분야에서도 ‘아이디어 착복’ 관행은 심각하다. 대놓고 비딩 참여 업체들의 아이디어를 발주처가 가져가겠다고 말하진 않아도, 과업지시서 내용에 그런 뉘앙스의 표현을 써놓는다.

일례로 지난 19일 조달청에 올라온 ‘2019년 인천 중구치매안심센터 홍보영상 제작사 선정’ 건을 보면,  내용 중 “본 제안요청서의 전체 또는 일부를 제안서 제출 이외의 다른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음”이라거나 “제출된 제안서에는 제안사의 고유한 개념과 아이디어가 포함될 수 있으나, 제안서 내에 독창적 정보라고 명시되지 않는한 발주처는 이를 임의로 사용할 권한을 가짐”이라는 등이 포함돼 있다.

‘2019년 인천 중구치매안심센터 홍보영상 제작사 선정’ 제안요청서 내용 중 발췌.

이와 함께 “제안서 및 입찰 참가와 관련된 일체의 비용은 입찰참가자의 부담으로 하며”라는 유의사항도 있다.

기획재정부가 최근 공고한 ‘2020년도 예산한 홍보’ 용역에서도 “제안서 작성 및 제출에 소요되는 모든 경비는 제안사 부담으로 한다” “본 제안요청서 및 제안서의 전체 또는 일부가 제안서 제출 외의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등의 내용이 들어 있다.

기획재정부가 발주한 ‘2020년도 예산한 홍보’ 용역 제안요청서 내용 중 발췌. 

즉, 경쟁입찰에 참여하는 것도 업체가 부담해야 할 몫이고, 최종적으로 탈락하더라도 제안서에 기재한 아이디어조차 사용 못하고 그대로 사장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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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해 C회사 대표는 “(비딩에) 떨어진 것도 억울한데 그 후에 대한 부담까지 질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규모가 작은 업체들은 더 힘들다. 희생을 감내하거나 계속 출혈경쟁을 하라는 소리나 다름 없다”고 성토의 목소리를 냈다.

그는 “사정이 이러니 사활을 걸고 반드시 따내야 하는 대형 프로젝트가 아니고선 정말로 괜찮은 아이디어는 제안서에 쓰지 않는다”며 “업체에 과도한 부담을 지우는 부당 관행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붕어빵 제안서, 그 나물에 그 밥 같은 기획안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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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없는사회를위해 2019-07-24 15:14:15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이런 악행 뿐 아니라 다양한 갑질 관행들이 낱낱히 드러나고 고발되어 개선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응원합니다~!

곽팀장 2019-07-23 10:44:58
구구절절 공감하고, 누구나 들으면 알만한 브랜드임에도 불구하고 RFP부터 대행사보고 써오라고 하는 경우도 있고 최종선정 된 이후에도 클라이언트의 일방적인 사유나 변심으로 엎어지는 경우들도 비일비재합니다. 혹시 피해사례 인터뷰 안하시나요? 한 3건 정도는 있는 것 같네요^^ㅋ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