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피알=최기영 | 1993년 우리나라 맥주 시장의 오랜 구도를 반전시킬 첫 단추가 끼워졌다.
1991년 3월 1일 조선맥주 영업담당 부사장에서 사장으로 취임한 박경복 회장의 둘째 아들 박문덕 사장은 취임에 때맞춰 드라이 공법의 ‘마일드’를 선보였다.
그로부터 17일 후 경쟁사 두산이 코너에 몰리게 된 페놀 방류 사건이 터졌다. 덕분에 마일드는 힘들이지 않고 반사이익을 볼 수 있었지만, 경쟁사 OB의 저력도 만만치 않았다.
그해 하반기부터 서서히 원상회복을 시작했고, 마일드는 다시 내리막길로 돌아섰다. 크라운맥주로서는 천재일우의 반격 기회가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설상가상 그 무렵 진로그룹이 맥주 시장에 뛰어든다는 소문이 돌았다.
위기(危機)는 곧 기회(機會)를 내포하고 있다고 했던가, 박문덕 사장은 신상품 개발 특명을 내렸다. 이에 따라 1992년 5월 마케팅부를 신설, 신제품 개발 준비 작업에 돌입했다. ‘지하 150m 천연수로 만든 순수한 맥주, 하이트(HITE)’의 탄생 순간이다.
40년 2위 자리 박차고 1위 고지 점령한 ‘하이트’
하이트 론칭 3개월 뒤 초기 구매 실상을 파악하고 중간 수정 전략 수립에 필요한 기초자료를 수집하기 위해서 소비자 구매실태 조사에 나섰다.
결과는 재구매 및 재음용률이 90% 이상으로 하이트의 시장 진입은 매우 성공적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하이트는 기록적인 매출 신장을 올리며 정상 궤도에 올랐다.
하이트의 지속적인 판매 호조에 힘입어 1993년 출시 당시 30% 선이었던 시장점유율이 이듬해 35%, 1996년 43%로 드디어 업계 1위, 최정상에 올라섰다. 이후 2000년 53%, 2009년 59%를 돌파하며 우리나라 맥주 시장 구도의 새로운 역사를 썼다.
하이트 성공과 함께 박문덕 회장은 조선맥주(주)였던 사명을 1998년에 하이트맥주로 변경한 데 이어, 2005년에는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인수전을 벌여 ‘국민 소주’라 일컫던 진로를 인수함으로써 ‘하이트진로그룹’이 출범했다.
하이트 성공은 ‘강력한 힘과 뚜렷한 대비’
필자가 기억하기에 하이트가 출시되자마자 느낀 첫인상은 지하 150m 암반 천연수가 바위를 뚫고 솟구치는 영상 때문인지 ‘강력한 신선함’(Powerful Freshness)과 ‘뚜렷한 대비’(Obvious Contrast)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골드 바탕에 장식적인 패턴과 빨강・검정으로 채운 이전 레이블과 비교할 때, 거의 흰 바탕에 신전 기둥처럼 서 있는 진한 녹색 ‘HITE’ 네 글자와 초콜릿색 병에서 느껴지는 강한 명암・색상 대비가 그런 느낌을 줬으리라 추측한다.

하이트 요새를 넘보던 ‘랄라라 오비라거’
하이트의 엄청난 턴오버에 당황한 OB맥주는 필사적으로 대응하며 ‘사운드’, ‘아이스’, ‘넥스’ 등 신규 브랜드를 론칭했지만 실패를 거듭했다.
OB맥주의 체면을 세워준 것은 역시 ‘오비’였다. ‘오비라거’를 브랜드로 채택하고, 1993년 ‘투캅스’로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등 코믹 연기로 충무로의 가장 확실한 흥행 코드가 된 박중훈을 광고 모델로 기용했다.
그가 실룩실룩 허리춤을 추며 “랄라라… 라~거 주세요!”, “잘~ 익은 맥주 주세요, 오비라거”로 광고를 하며 ‘오비라거’의 성공적인 론칭을 이뤄내 겨우 브랜드를 회복했다.
1994년 출시 이후 무서운 속도로 쫓아오던 진로쿠어스의 ‘카스’는 진로가 1997년 법정관리에 들어가고 1999년에 진로쿠어스가 1998년 벨기에 인터브루사와 지분 합작한 OB맥주에 인수되면서 자연히 OB의 제품 라인이 되었다. 몇 년간의 ‘삼두경쟁 구도’는 다시 ‘양강 구도’로 자리 잡았다.
오비라거의 추격으로 35%의 시장점유율을 빼앗긴 하이트는 1998년 기준 47%로 시장점유율 1위를 지키고 있었으나, 선호도에서는 오비라거에 미치지 못하자 다시 한 번 비장한 각오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경쟁사들이 겪었던 다양하면서도 활발한 환경 변화에 비해서는 소비자가 인지할 만한 변화가 없었다는 것은 곧 브랜드의 심증적 정체, 다시 말해 식상해졌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상황이었다.
1999년 2월, 극비 프로젝트에 착수하다
브랜드의 라이프사이클이 극히 짧은 한국의 시장 특징으로 볼 때, 시장점유율 1위를 지키고 있어도 선호도 조사에서 오비라거에 뒤지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위기를 의미했다.
1993년 하이트 출시 후 6년 동안 진로쿠어스의 카스가 도약하고, OB 측의 시장 회복 노력으로 등장한 아이스, 넥스가 시장을 오르내리며 소비자들은 줄곧 새로운 상품에 익숙해진 반면, 하이트는 ‘시장점유율 1위’라는 단꿈에 취해 소비자가 인지할 만한 변화를 주지 못했다.
이에 따라 심증적으로 ‘하이트는 늙은 브랜드’라는 느낌을 줄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당시 하이트 내부적으로 신제품 출시 계획이 없어 브랜드 리뉴얼(Brand Renewal) 전략으로 새로운 승부수를 던졌다.
아이러니하게도 1994년 진로쿠어스의 카스 맥주 탄생에 참여한 필자가 몇 년 뒤 C.I. 전문회사 DFI의 부시장 자격으로 이 리뉴얼 작업에 참여했다. 그때 대뜸 흰 A4 용지에 연필로 무엇인가를 휘갈겨 그렸다. 1993년 5월 하이트가 처음 출시되었을 때의 인상을 그린 것이었다.
“지하의 암반을 뚫고 용솟음치며 휘감아 오르는 지하 암반수의 ‘강한 힘’과 짙은 갈색 유리병을 감고 있는 흰 바탕에 짙은 녹색의 굵은 대문자 HITE의 ‘콘트라스트’, 바로 이것을 되찾아야 해! 쓸데없이 SWOT 분석이니 뭐니 하느라 시간 낭비할 것 없다.”
이렇게 외치고는 연필로 쓴 그 메모를 팩스로 하이트에 보냈다. 그렇게 이 프로젝트는 정식으로 계약되었고, 1999년 2월 1일부터 빠른 속도로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기울어진 영문 사체(斜體)와 색상 머천다이징의 명승부
하이트 탄생 6년 만에 추진된 아이덴티티 리뉴얼(Identity Renewal)은 우리나라 맥주업계에서는 보기 드물었던 영문 사체(斜體・Italic) 대・소문자를 브랜드 로고에 넣어 과감하게 출발했다. 또 다른 변화로 비주얼 머천다이징(Visual Merchandising)의 한 줄기인 색상 머천다이징(Color Merchandising) 전략을 도입했다.
13.5도 기울어진 사체의 굵은 영문 대・소문자를 섞어 표기하면서 지하 150m 암반을 뚫고 용솟음치던 ‘지하 암반 천연수’의 힘찬 속도감과 함께 강한 힘을 느낄 수 있도록 했고, 짙은 청녹색(Bluish Dark Green) 계열의 상징색(Identification Color)을 이용한 색상 머천다이징을 구현해 강력하면서도 뚜렷한 명암 및 색상 대비 효과(Contrast Effect)를 주어 시각적 시원함을 느끼게 하는 비주얼 머천다이징 기법을 활용했다.
이는 시각적 정보가 곧바로 뇌에 전달돼 시각적으로 느낀 것을 미각적으로도 느끼게 하는 심층심리학적 접근의 한 갈래다.
빨간색 보타이(Bowtie)로 상징되는 미국의 버드와이저(Budweiser) 맥주는 언제 어디서나 모든 커뮤니케이션이 빨간색으로 완성된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강력한 색상 머천다이징을 구현하고 있다.
새로운 하이트 브랜드 아이덴티티 요소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요소로 꼽는 것이 바로 청녹색을 띤 상징색, 짙은 녹색이다. 이 색은 보색 관계가 아님에도 노란 맥주와 훌륭한 색상 대비를 이루며, 진갈색 병과도 어색함 없이 잘 어울린다.
또한 흰색 바탕, 밝은 회색과도 조화를 이루며 강력한 대비 효과를 보여줄 뿐 아니라, 하늘색 또는 파란색과도 무리 없이 어울리는 색채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브랜드 아이덴티티 리뉴얼
이렇게 하이트의 브랜드 아이덴티티 리뉴얼과 새로운 머천다이징 전략을 실행한 이후 하이트 맥주의 시장 지배 동력은 빠르게 힘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늘 매출액으로 드러난다.
새로운 브랜드 아이덴티티와 머천다이징 전략을 실행한 1999년 47%였던 시장점유율이 이듬해 2000년 53%까지 올라서더니 2년 뒤인 2002년, 500ml 기준으로 100억 병이라는 기록적 매출 신장을 이어갔다.
그 뒤 2007년 200억 병을 판매한 데 이어 2013년 300억 병 판매라는 새 역사를 썼다. 300억 병 판매는 국내 맥주 단일 브랜드 최대 기록이자 국내 식음료 제품 역사에서도 손꼽을 만한 신기록이다. 300억 병을 한 줄로 놓으면 지구를 189바퀴 돌릴 수 있는 길이다.

이렇게 2011년까지 15년간 탄탄하게 자리를 지키던 국내 맥주 시장에서의 점유율 1위 자리는 아이러니하게도 OB맥주가 인수한 카스에게 빼앗겼다. 카스를 낳은 진로는 하이트 집안으로 들어와 하이트진로가 되었건만, 진로 태생의 카스는 하이트를 눌러 2위로 주저앉히는 형국이 된 셈이다.
하이트진로는 2019년 3월 호주 맥아를 사용한 청정 라거 ‘테라’(Terra)를 출시하고, 2023년 2월까지 36억 병이 팔리는 등 새로운 돌풍을 일으키며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출시 이후 연평균 23%의 성장률을 보인 것이다.
독일의 ‘맥주순수령’에 따르면 맥주는 모름지기 세 가지 이외에 아무것도 들어가서는 안 된다. 바로 물, 홉, 맥아다.
하이트진로는 2023년 4월 물, 홉 외에 맥아만 100% 사용한 이른바 가장 맥주다운 맥주라는 올 몰트(All Malt) ‘켈리’(Kelly)를 론칭하며 다시 시장점유율 1위를 노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