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피알=김민지 기자 | 제약사의 연구개발(R&D) 투자율을 높이고 해외 진출을 장려하기 위해 만들어진 ‘혁신형 제약기업 인증제도’를 둘러싸고 최근 업계에서 개선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혁신형 제약기업에 대한 지원의 정도가 피부에 크게 와닿지 않아 단순히 명목만 내세우기에 불과하다는 불만이 제기되고 있고, 산업 육성 취지에 맞지 않는 심사 기준을 업계 실정에 맞게 손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이다.
혁신형 제약기업 인증을 받은 제약사는 정부 주도 R&D 참여 우대와 세액 공제, 연구시설 건축 시 규제 완화, 대출 지원 등 다양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제도 목적에 맞게 신약 R&D 등에 투자 실적이 있는 기업을 대상으로 하며, R&D 투자와 의약품 특허 및 기술이전 실적 등을 기준으로 인증 평가를 진행한다.
혁신형 제약기업 인증의 심사 시즌만 되면 제약사들 간에 희비가 명확히 갈린다. 신규 인증 또는 재인증에 성공한 기업은 연일 자사 R&D의 혁신성을 알리고, 심사에 탈락한 제약사는 이로 인해 생길 수 있는 회사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상승과 주가 하락 등을 방어하느라 바쁘다.
연구개발에 공들인 기업에는 이익을, 그리고 부족한 기업에는 혜택을 면하는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지난 수년 동안 업계 내에서는 이 제도를 대대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국내 대형 제약사 관계자 A씨는 “새로운 의약품 개발을 가속화하고,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높이려는 기업에게는 이러한 혜택들이 사업 전개를 원활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면서도 “실효성에 대한 논란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A씨에 따르면, 각 제약사들은 세제 혜택과 다양한 연구지원 프로그램을 혁신형 제약기업 인증 제도의 이점으로 꼽는다. 특히 2016년부터는 혁신형 제약기업에 약가 우대 요건도 적용되면서 제약사들이 앞다퉈 명단에 오르려 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제도 도입 12년 동안 바뀌어나간 제약산업의 경향과 각 제약사의 사정 등을 제도가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다른 대형 제약사 관계자 B씨도 “혁신형 제약기업에 선정되면 혜택을 받는 게 맞지만, 회사 차원에서 실질적으로 큰 도움이 된다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다른 제약사 관계자 C씨도 “약가 인하율을 감면해주고 있어 이득은 있지만 이 점 외에는 회사에 큰 혜택이 없다”고 답했다.
겉으로는 마치 혁신형 제약기업에 선정된 제약사들이 그렇지 않은 회사는 누릴 수 없는 특별한 혜택을 받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혜택의 정도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제약사도 적지 않으며, 굳이 혁신형 제약기업이 아니더라도 이들이 받는 혜택과 유사한 지원을 받는 방법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정윤택 제약산업전략연구원 원장은 “혁신형 제약기업 인증 제도의 지원 사항이 다양하나 제약사들이 현실적으로 체감하기 어려운 수준이며 이미 타 근거 법령에 의해서도 지원되는 부분들이 많다”며 “제약사들이 막상 명예 수준으로 인증제를 활용하는 경향도 나타나는데, 그 인증을 유지하기 위해 수행하는 관리·감독 등의 노력들이 소모적”이라고 지적했다.
업계에서 체감할 수 있는 정도의 재원 혜택을 제공하고자 기금·펀드가 마련돼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재원 확보가 원활하지 않아 실질적인 제도 개선이 쉽지 않다는 것. 기금 조항은 제약산업육성법 발의 당시 포함됐으나 입법 과정 중 삭제됐다.
정 원장은 “제약사 사이에서 이 제도가 소위 ‘계륵’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며 “자금 이슈가 해결되어야만 전체적인 지원책이 확대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획일화된 혜택...기업 유형에 따라 세분화해야
혁신형 제약기업에 대한 ‘맞춤형 혜택’이 필요하다는 요구도 이어지고 있다. 제도 도입 당시에는 없었던 새로운 유형의 제약사가 생겨나는 가운데, 획일적인 지원이 아닌 각 회사의 규모와 사업 현황 등에 맞춰 지원책을 다양화해야 한다는 것.
A씨는 “R&D 투자가 적거나 제품 상용화에 더 초점을 맞추는 기업들은 이 제도의 혜택을 크게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 원장도 앞서 제시한 기금 마련 목적이 맞춤형 지원의 예산 편성을 위한 재원 확보라고 강조했다.
복지부도 제약사들의 요구에 귀 기울여 2019년부터 제도 개편을 고민하고, 지난해 본격적인 리뉴얼에 나선다는 입장을 내놨다. ‘일반형’, ‘벤처형’, ‘외국계’로 기업 유형을 나눠 각자에 필요한 지원을 제공하는 방안이다.
가령 대규모 생산시설을 이미 갖추고 있으며 신약 개발을 주도하는 일반형 제약사에는 초기보다 후기의 임상 시험 지원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특정 의약품을 전문적으로 개발하는 벤처기업에는 파이프라인 확보를 위한 지원에 더 집중하며, 외국계 기업에는 약가 혜택을 과감하게 지원하는 것 등이 실질적으로 더 유용하다는 설명이다.
정 원장은 “2012년 제도 시행 후 1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르며 각 기업 간 비즈니스 모델도 다변화됐다”며 “가령 CDMO(위탁개발생산), CRO(임상시험수탁) 등을 주력 사업으로 진행하는 기업들도 늘어나는 상황인데, 다양한 비즈니스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체계를 세우고 선발, 인증 평가, 지원을 기준에 나눠 진행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5년 전 직원 일탈로 처벌받은 리베이트...산업육성법에도 걸리는 ‘이중 규제’
산업 육성 취지와 빗나가는 심사 기준에 대해서도 불만의 목소리가 크다. 업계에서는 회사의 업무 과정에서 발생한 불미스러운 일로 타 법령에 따라 행정처분을 받았음에도, 같은 사유로 혁신형 제약기업 인증 자격이 박탈되는 건 이중 처벌로 가혹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인증제 평가 기준에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윤리성 항목이 포함돼있다. 약사법 위반에 해당하는 불법 리베이트가 대표적인 결격 사유다. 이로 인해 몇몇 제약사들은 연구개발 면에서 우수성을 인정받았음에도 재인증 실패라는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B씨는 “경·검찰, 공정위, 식약처 등 여러 사정기관을 통해 형사처벌 또는 행정처분을 이미 받았는데 연구개발을 장려하는 취지의 제약산업육성법에서 이중으로 불이익이 가해지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말했다.
R&D 투자실적과 해외 진출 성과, 우수한 비전을 갖고 있더라도, 불법 리베이트 등 정부가 정한 ‘금기’ 사항을 한 번이라도 위반한다면, 혁신형 제약기업에 선정되지 못해 R&D 관련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다.
특히 리베이트 관련 문제의 경우 조직적으로 이뤄지기보다 영업사원 개인의 일탈로 인한 사례가 다수인데, 혁신형 제약기업 인증 심사 시 직책을 막론하고 최근 회사가 리베이트로 조금이라도 잡음을 일으켰다면 탈락은 확정된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제약사들의 공정거래 준수가 과거에 비해 눈에 띄게 좋아졌음에도 일부 직원의 개인적 일탈 행위에 의한 행정처분으로 인해 사실상 ‘비(非) 혁신형 제약기업’으로 낙인이 찍혀 혁신 신약 투자사업에까지 불이익을 겪는 만큼 이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A씨는 “리베이트 문제는 단호히 대응해야 한다는 원칙으로 바라봐야 하지만 영업사원의 개인적 일로 전체 산업과 기업이 제재받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말했다.
B씨도 “최근 이슈가 되는 리베이트 사건들은 대부분 과거 일이고 회사 차원의 리베이트는 거의 드물다”며 “많은 회사들이 2010년 후반대에 들어서면서 CP(공정거래자율준수프로그램) 도입 등 자정 노력을 굉장히 열심히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또 위반 당시의 시점이 아닌 행정처분 시기를 기점으로 위반행위를 판단해 심사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두 시점의 간격은 5년, 길게는 10년 가까이 차이가 나는데, 오래전 발생한 일로 R&D 투자와 해외 진출에 제약이 생기는 것이 제약산업육성법의 취지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B씨는 “인증제 교육을 받고 R&D 투자 등 사업을 열심히 꾸려나가는 중이더라도 과거 일로 근래 행정처분을 받으면 그해 혁신형 제약기업 인증에 취소된다”며 “과거에 불거졌던 일이 한참 뒤에야 처분 결과로 나오는 것인데 행정처분을 기점으로 심사하는 것은 시기상 합리적이지않다고 느껴진다”고 말했다.
이러한 반론 속에서 업계는 기업 사정에 맞게 평가 잣대를 정교하게 다듬고 업계가 인정할 만한 심사 기준 구축을 요구하고 있다. 특정 행정처분만으로 인증여부가 갈리는 평가를 대체해 국제 표준 인증인 ISO 37001(부패방지경영시스템)이나 CP 프로그램 상위 등급 취득을 고려한 다각적인 심사가 그 대안으로 꼽힌다.
정 원장은 “제약 기업의 특성과 윤리성 제고를 위한 기업들의 노력을 파악해 기준을 세우고 엄격하게 박탈시키는 것보다 일부 구제도 이뤄지는 방향으로 개선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A씨도 “법의 취지에 맞는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며 “정부와 업계가 함께 논의해 합리적인 제도 개선 방향을 모색하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