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피알 매거진

Z세대, 176년 된 소설 ‘백야’에 반했다

[브리핑 지] 도스토옙스키 단편, 틱톡 바이럴로 판매 급증

“사랑 혹은 쓸쓸함에 빠지고 싶은 이들을 위한 책”
‘주인공 신드롬’을 겪는 소셜미디어 세대의 열광
19세기 작가가 묘사한 처절한 외로움에 큰 공감

  • 기사입력 2025.01.10 08:00
  • 최종수정 2025.01.10 09:35
  • 기자명 박주범 기자

더피알=박주범 기자 | ‘이름 모를 청년이 어느 밤 우연히 한 여자를 만난다. 그는 고통스러울만큼 외롭고, 그녀는 연락 없는 연인의 소식을 기다리면서 괴롭다. 청년은 몇 밤 더 그녀를 만나면서 짝사랑에 빠진다. 여자가 연인이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두 사람은 함께 할 수 있는 삶을 상상하며 흥분한다. 다음 날, 여자의 연인이 돌아오고 그녀는 청년을 버린다.’

소셜미디어에서 Z세대는 음악과 그림으로 '백야'에 관한 쓸쓸함을 표현한다. 틱톡 동영상 캡처
소셜미디어에서 Z세대는 음악과 그림으로 '백야'에 관한 쓸쓸함을 표현한다. 틱톡 동영상 캡처

어찌 보면 흔한 사랑이야기가 소셜미디어에서 Z세대를 강타했다. 별다를 것 없어 보이지만 배경이 된 장소는 러시아의 성 페테르부르크, 때는 무려 1848년 여름이다. 이 시기 저녁은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아 백야라고 불린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Fyodor Dostoevsky)의 ‘백야(White Nights)’가 5만 부 이상의 판매를 기록하면서 2024년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고 경제전문지 파이낸셜 타임스(FT)가 보도했다.

이를 계기로 표도르 열풍(Fyodor Fever)에 관한 매체들의 분석이 이어지고 있다. 약 2세기 전에 활동한 러시아 문호가 북톡(booktok) 스타로 떠오르면서 벌어진 일이다.

사용자의 1/3이 25세 미만인 틱톡에서 독자들이 간략하고 진정성 있는 도서 추천을 공유하는 북톡 커뮤니티의 영향력은 엄청나다. 2022년 조사에 따르면 16~25세의 3/5가 북톡이 독서에 대한 열정을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답했다.

Z세대의 독서 습관에 북톡의 영향력은 엄청나다(북톡 커뮤니티 검색)
Z세대의 독서 습관에 북톡의 영향력은 엄청나다(북톡 커뮤니티 검색)

북톡은 그동안 청소년 대상의 소설을 쓰는 현대 작가들의 전유물이었다. 보통 로맨스, YA(청소년 문학)와 판타지 분야의 신간들이 인기를 얻는다.

그래픽노블 ‘하트스토퍼(Heartstopper)’를 쓴 앨리스 오세만(Alice Oseman), 헐리웃 영화로도 만들어진 ‘우리가 끝이야(It Ends With Us)’의 콜린 후버(Colleen Hoover), ‘가시와 장미의 궁정(A Court of Throne and Roses)’을 집필한 사라 제이 마스(Sarah J. Maas) 등은 북톡에서 엄청난 화제를 모은 작가들이다.

젊을 때만 가능한 종류의 밤 묘사에 Z세대 마음 열어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야'는 틱톡 세대의 사랑과 고민을 정확히 관통했다(가디언 보도)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야'는 틱톡 세대의 사랑과 고민을 정확히 관통했다(가디언 보도)

그런데 뜬금없이 200년전 작가가 어떻게 그들과 나란히 서게 되었을까?

도스토옙스키가 26세였을 때 쓴 ‘백야’에서 역시 26세의 이름 없는 내레이터는 “멋진 밤, 친애하는 독자 여러분, 우리가 젊을 때만 가능한 종류의 밤”을 묘사한다.

그는 외로운 젊은이로, 어색하고 괴짜 같고, 여성에게 익숙하지 않아 그들과 대화하는 방법조차 모르는 사람이다(온라인에서 완전히 고립된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부분).

사실 젊은이들은 항상 망가진 채 사랑에 애태우는 주인공이 되어 엇갈린 영혼에 아파해 왔기 때문에 ‘백야’의 성공이 메시지에 있다기보다 매체의 차이점에 있다고 파이낸셜타임스는 분석했다.

책의 품질(+간결함), 틱톡 추천알고리즘, 펭귄 클래식(Penguin Classics)의 똑똑한 마케팅의 조합이라는 것이다.

펭귄 클래식의 두 가지 '백야' 에디션
펭귄 클래식의 두 가지 '백야' 에디션

펭귄 클래식은 백 카탈로그를 활용해 ‘백야’를 소셜미디어용으로 완벽한 두 에디션으로 출시했다. 소형 페이퍼백은 3파운드(약 5500원), 흰색 천으로 된 포켓 사이즈 하드커버는 10파운드(약 1만8000원)지만 틱톡과 인스타그램에서 그럴듯해 보인다. 그래도 2024년 판매된 5만 부 중 86%는 저렴한 버전이었다.

소설 속 인물이 소셜미디어 사용자들과 비슷한 성향이다?

영국 일간 가디언(Guardian)은 사람들이 연간독서목표에 도움이 되는 80페이지라는 짧은 분량으로 고전 러시아 문학이라는 다소 어려운 영역에 발을 들일 수 있게 한 책이라는 점과 함께 새로운 독자들에게 공감을 얻은 이유로 스토리 자체를 짚었다.

정교한 판타지 삶을 구축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소셜미디어에서 특히 반응이 컸다고 분석했다.

소셜미디어 사용자들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삶을 낭만화한다. 자신을 허구화된 삶의 주인공으로 생각하는 ‘주인공 증후군(main character syndrome)’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데, ‘백야’의 내레이터도 심각한 경우라는 것이다.

22세의 북스타그래머 마우사미 아비라(Mausami Avira)는 “이 책은 꿈꾸는 사람들을 포착한다. 즉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세계 속에 사는 사람들이다”고 말한다. “소셜미디어가 우리를 믿도록 길들여 온 것(과 비슷하다)”

미국 경제 전문지 패스트컴퍼니(Fast Company)는 외로움과 갈망이라는 주제 때문에 백야가 소셜미디어 세대의 공감을 얻었다고 분석하면서, 16~24세의 젊은이들은 다른 연령대보다 더 외로움을 느끼고, Z세대의 73%가 때때로 또는 항상 외로움을 느낀다고 보고한 포브스 데이터를 가져왔다.

'백야'의 페이지마다 절절히 공감하는 독자들의 북스타그램(인스타그램의 독서커뮤니티)
'백야'의 페이지마다 절절히 공감하는 독자들의 북스타그램(인스타그램의 독서커뮤니티)

틱톡에서 해시태그 #Dostoevsky를 단 게시물이 3400만 개 이상에 달하고, 책을 검색하면 열렬한 리뷰, 주석 달린 사본, 우울한 장면 위에 겹쳐진 인용문들이 가득하다. 차이코프스키와 쇼스타코비치 등의 음악으로 채워진 스포티파이의 ‘백야 플레이리스트’도 독자들이 이야기의 우울함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도록 한다.

한 틱토커는 “19세기에 살았던 러시아인이 내가 겪고 있는 문제를 완벽하게 설명해 준다”고 고백했다.

북톡을 통해 새로운 세대 진출에 성공한 고전문학 작가는 도스토옙스키 외에도 ‘밀레나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가 있다.

이제 틱토커들은 ‘백야’ 이상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크누트 함순(Knut Hamsun), 안톤 체홉(Anton Chekhov) 등을 추천한다.

이러한 유행에 대해 파이낸셜 타임스는 어떤 방식으로든 책은 여러 세대에 걸쳐 다른 언어로 끊임없이 말을 걸면서 지속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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