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피알=박주범 기자|2025년, 영상 산업의 중심축이 세로로 기운다. 몇 년 전만 해도 틱톡과 유튜브의 짧은 클립은 가볍고 즉흥적인 콘텐츠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이제 1~2분짜리 세로형 스토리, 이른바 ‘마이크로드라마(microdrama)’가 엔터테인먼트의 새 시장을 열고 있다. 북미 전용 프리미엄 앱이 잇달아 출시되고, 메이저가 자본과 제작 역량을 싣기 시작했다.
지난 달 발표된 액티베이트 컨설팅(Activate Consulting)의〈2026년 기술 및 미디어 전망(Technology and Media Outlook 2026)>리포트에 따르면 Z세대의 43%가 기존 TV나 스트리밍보다 유튜브와 틱톡을 선호한다. 이들에게 이제 세로 화면은 서사의 기본 포맷이다. 이들이 소비하는 콘텐츠는 30분짜리 에피소드가 아니라, 90초짜리 감정의 순간이다. 액티베이트는 미국 성인 2,800만 명이 마이크로드라마를 시청하고 있으며, 그중 절반이 18~34세라고 분석했다.

이러한 시청 습관의 변화에 할리우드조차 ‘세로 시대’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엔터테인먼트 전문 매체 더할리우드리포터(The Hollywood Reporter 11월 5일 보도)에 따르면 최근 폭스 엔터테인먼트는 우크라이나의 버티컬 플랫폼 ‘홀리워터(Holywater)’에 투자해 2년 내 200편 이상을 제작하겠다고 발표했다.
미라맥스(Miramax) 전 CEO 빌 블록이 설립한 ‘감마타임(GammaTime)’은 10월 23일 PR 뉴스와이어에 게재한 공식 발표에서 킴 카다시안, 크리스 제너, 레딧 공동창립자 알렉시스 오하니안 등으로부터 1,400만 달러(약 204억 원) 투자를 유치하고 프리미엄 마이크로드라마 플랫폼을 출범했다고 밝혔다. 앞서 8월 공개한 ABC·쇼타임·NBC 출신들이 만든 스타트업 ‘마이크로코(MicroCo)’까지 업계는 이미 마이크로드라마 제작 붐이다.
수요는 이미 입증됐다. 데이터분석 플랫폼 센서타워(SensorTower)의 2025년 1분기 글로벌 숏드라마 앱 인앱결제 보고서에 따르면 글로벌 인앱결제(IAP)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약 4배 늘어난 7억 달러(약 1조 2백억 원) 규모에 도달했다. 초기 선두주자 릴쇼트(ReelShort)와 드라마박스(DramaBox)가 1~2위를 지키는 가운데, 플릭릴스(FlickReels)나 드라마웨이브(DramaWave) 같은 신흥주자가 급성장 중이다.

마이크로드라마는 팬데믹 당시 중국에서 시작됐다. 더우인(Douyin)과 콰이쇼우(Kuaishou) 같은 플랫폼이 저예산 세로극을 실험했고, 로맨스물이 특히 폭발적 반응을 얻었다. 그 모델이 미국으로 건너와 현지화된 것이다.
이들은 17억 달러(약 2조 4천억 원)를 투입하고도 6개월 만에 사라진 퀴비(Quibi)의 실패를 교훈 삼아 수백만 달러를 쏟아붓는 대형 스타 중심 제작 대신, 회당 예산 10만~30만 달러의 실험형 시리즈로 접근한다.
60~90초의 초단편으로 구성된 시리즈는 몇 화는 무료로 공개하고, 이후에는 유료 결제나 광고 시청으로 이어지는 ‘프리미엄(freemium)’ 모델을 채택한다. 히트작을 예측하기 불가능한 시대에 맞춰 빠르게 찍고 대규모로 테스트하는 저비용·다작·다테스트의 공장형 서사다.
일부 비평가들은 마이크로드라마의 ‘브랜드 충성도’가 아직 약하다고 지적한다. 시청자들이 특정 플랫폼에 머물지 않고, 소셜미디어와 스트리밍앱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기 때문에 마이크로드라마 앱들은 여전히 틱톡 같은 외부 플랫폼을 마케팅 허브로 활용해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흐름이 되돌려질 가능성은 낮다. 액티베이트 리포트는 2029년까지 전통 TV 시청 시간이 하루 1시간 17분으로 줄어드는 반면, 스트리밍 비디오 시청 시간은 4시간 8분으로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광고와 구독을 포함한 스트리밍 수익은 연평균 18~19% 증가가 예상되는 반면, 기존 TV 수익은 4~6% 감소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단지 소비 패턴의 결과물이 아니라 문화적 감수성의 변화이기도 하다. 미디어 연구서 [중국 TV 시리즈 블루북 2025(The Blue Book of China TV Series 2025)]는 마이크로드라마를 “디지털 피로의 시대에 감정적 효율성을 극대화한 형식”이라 정의한다. 시청자들은 자극적인 콘텐츠 대신, 짧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이야기, 즉 ‘감성 압축형 스토리’를 원한다. 3분 안에 울고 웃고 분노할 수 있다면, 굳이 60분짜리 드라마를 기다릴 이유가 없다.
또한, 마이크로드라마는 ‘장벽없는 제작’으로 창작 구조를 민주화했다. 카메라 하나만 있으면 누구나 드라마를 만들 수 있고, 알고리즘이 이를 자동으로 시청자에게 매칭한다. 경제적 잠재력도 크다. 중국 미니시리즈 시장은 2021년 368억 위안(약 7조 5천억 원)에서 2023년 3,739억 위안(약 76조 4천억 원)으로 급성장했고, 2027년에는 1조 위안(204조 5천억 원)을 돌파할 전망이다.
이런 성장세는 글로벌 투자자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스트리밍 컨설팅 회사 아울앤코(Owl & Co)의 보고서(<Global Short Form Media Outlook 2025>)는 올해 중국 외 지역의 버티컬 플랫폼 수익이 30억 달러(4조 3천억 원)를 넘을 것으로 내다봤다.
할리우드는 ‘버티컬판 넷플릭스’를 꿈꾼다. 누가 먼저 글로벌 구독자를 확보해 브랜드화에 성공하느냐가 관건이다. 이를 위해서는 콘텐츠 질을 높여 유행이 아니라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북미 상위권 앱들은 로맨스 일변도에서 벗어나 패밀리·실화 범죄·스릴러·애니메이션 등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이 산업의 진짜 가치는 데이터에 있다. 마이크로드라마는 매초 시청자의 반응을 수집한다. 몇 초에 화면을 넘겼는지, 어떤 장면에서 머물렀는지, 감정 반응을 이끌어낸 키워드가 무엇인지까지 실시간으로 분석된다. 그 결과, 창작과 분석이 결합된 새로운 스토리 제작 방식이 등장했다. 시청자 데이터에 따라 대본을 수정하거나 후반 작업을 조정하는 시스템이다.
소설 한 권 혹은 영화 한 편으로 경험했던 감정의 여정을 90초짜리 클립으로 제공하지만 짧다고 반드시 피상적인 것은 아니다. 잘 만든 마이크로드라마는 영화처럼 완결된 감정선을 지닌다. 축약된 서사 속에서 한 문장, 한 표정, 한 컷의 힘이 더욱 강화된다.
길이가 아니라 밀도가 스토리의 가치를 결정하는 시대. 누가 더 오래 붙잡느냐가 아니라, 누가 30초 안에 공감을 일으키는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