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수치와 속도가 지배하는 시대지만 한국 산업의 저변을 묵묵히 떠받치는 존재는 조용히 현장을 지키며 시장과 함께 호흡해온 ‘강소기업’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잘 모릅니다. 언론에 잘 나오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위기 때마다 방향을 바꾸었고, 흔들릴 때마다 본업에 집중했습니다. 한 제품에 미치고, 하나의 고객 불편에 끝까지 천착하며 ‘지속’이라는 기적을 만든 기업들입니다. 이 기획은 그런 기업들을 찾아 나서는 여정입니다. 오래된 도전과 소박한 철학, 그리고 다시 일어서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지속가능한 기업의 생존 조건이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더피알=김경탁 기자 | “창업은 누구나 합니다. 문제는 지속이죠. 그걸 버텨내는 힘은 말이 아니라, 실천에 있습니다.”
인천광역시 부평구 청천동에 있는 영메디칼바이오 사옥에서 만난 권영조 대표의 조용한 말투 속에는 강단이 있었다.
수많은 중소기업이 업종 전환과 도산을 반복하던 지난 20여 년간, 그는 한 번도 간판을 바꾸지 않고 회사를 지켜왔다. 그 배경에는 단단한 제조 기반과 끈기, 그리고 시대 흐름에 뒤처지지 않으려는 자기 갱신의 철학이 있었다.
권영조 대표는 26년간 의료기기 외길을 걸어온 중소기업인이다. 그가 이끄는 기업은 세라믹 건강 매트로 출발해 한때 중국 시장에서 연매출 200억 원을 달성했으며, 이후에는 코로나 팬데믹과 중국산 초저가 제품의 공습까지 견뎌냈고 위기 때마다 과감한 전환을 선택했다.
2025년 여름, 영메디칼바이오가 세운 목표는 의료용 흡입기 ‘터치훅’의 10만 개 판매와 반려견용 냉감패드의 시장 안착 두 가지라고 한다. 시장도 바뀌었고 유통도 바뀌었다. 그러나 ‘실행’이라는 원칙은 여전하다.

“건강 매트로 200억”… 그리고 CCTV 사태
1990년대 말, 권 대표는 세라믹 소재를 접목한 온열 건강 매트에 주목했다. ‘십장생’이라는 브랜드를 론칭하고, 체험방과 대리점, 다단계 등 여러 유통망을 발판 삼아 전국으로 제품을 확산시켰다.
국내 홈쇼핑 시장이 전성기를 누리던 때였다. 세라믹을 고온에 구워 원단에 수작업으로 부착한 ‘십장생’ 브랜드는 체험방 중심 유통에 성공했고, 전국에 170여 개 대리점을 거느렸다.
기세를 몰아 2006년에는 중국 연길시 개발구에 현지 공장을 세우고, 의료기기 허가까지 취득하며 글로벌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당시만 해도 베이징에 주재원 6명, 공장 직원 136명, 전국 176개 대리점 규모를 갖춘 탄탄한 기업으로 성장했으며, 연매출은 최대 200억 원에 달했다.
그러나 2010년, 중국 CCTV가 “한국산 의료기기는 비싸기만 하고 효과는 없다”는 비방성에 근거도 없는 내용의 소비자 고발 프로그램을 방영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당시 중국에 진출한 한국 회사들이 많았는데, 하루아침에 시장이 무너졌어요. 방송 내용이 지방까지 계속해서 전파되고 여론이 번지면서 버틸 수가 없었죠.”
결국 그는 2018년 공장을 현지 기업에 고용승계를 조건으로 양도하면서, 퇴직금과 미지급금까지 넘겨준 뒤 중국 사업을 접고, 국내 사업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코로나가 바꾼 길…‘작고 강한’ 제품으로
중국 사업 철수 후, 그는 국내 체험방 46곳에 자사 제품을 무상 공급하며 유통망을 재건하기 시작했고, 단합대회를 열며 의기투합했다. 그리고 2020년에 코로나19 팬데믹이 닥쳤다.
대면 영업은 불가능해졌고, 체험 기반의 유통망은 사실상 붕괴됐다. 매출은 불과 몇 달 사이 10분의 1 수준으로 추락했다. 권 대표는 대리점에 무상 공급했던 제품에 대한 미수금 회수도 포기해야 했다.
“매장 임대료도 못 낸 대리점주들 사정이 우리보다 더 절박했어요. 돈 받으러 갔다가 위로하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권 대표는 좌절하지 않고 완전한 전환에 나섰다. 전환의 핵심은 소형 의료기기.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대형 의료기기에서 소형 생활밀착형 제품으로였다. 누구나 집에서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고, 리뷰 기반 온라인 커머스에 적합한 제품을 개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중 대표 주자가 바로 여름철 벌레에 물렸을 때 사용하는 의료용 흡입기 ‘터치훅’이다.
“사람들은 보통 긁거나 바르죠. 하지만 모기 침(타액)이 피부에 남아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겁니다. 침을 빼내야 붓기도, 가려움도 줄일 수 있어요.”
터치훅은 공기 압력 차를 이용해 침과 체액을 흡입하는 구조다. 날개형 손잡이를 위로 당기면 내부 진공이 형성되며, 흡인구는 소·대형으로 교체 가능하다. 내구성 강한 ABS 소재로 제작돼 외부 활동 중에도 쉽게 사용할 수 있고, 간단한 세척으로 재사용이 가능하다.
2023년에는 ‘디톡스버그’라는 이름으로 출시했지만, 임상 결과 제시 없는 ‘디톡스’ 표현이 의료 효능을 오인하게 한다는 이유로 식약처 민원에 걸려 제품명과 패키지, 설명까지 전면 수정해야했다.
이후 제품은 ‘터치훅’이라는 현재의 이름으로 재탄생했고, 쿠팡과 네이버 스마트스토어 등에서 좋은 반응 속에 팔려나가고 있다.

중국산과 싸우려면 다르게 만들어야
우리나라 중소상공인에게 지금 현재 가장 실질적인 위협은 알리익스프레스, 테무 등 C커머스의 초저가 공세다.
“우리는 1만3800원에 파는데, 중국 사이트에선 3분의 1, 심하면 10분의 1 가격으로 비슷한 제품이 나와서 국내 셀러들이 다 무너지고 있어요.”
권 대표는 중국산 저가 공세에 맞서기 위해 소재 차별화를 선택했다.
영메디칼바이오에 효자상품인 코골이 방지기 ‘노즈훅’에 대해 항균·살균·곰팡이균 제거 기능이 있는 신소재를 접목한 신모델 개발이 한창이며, 이 소재가 입증되면 다른 제품군으로 확대 적용할 계획이다.
“중소기업이 가격으로 경쟁하면 무조건 집니다. 그러니 다르게, 더 낫게 만들어야죠.”

브랜드 전략도 새롭게…십장생·폴라베어·영메디칼
영메디칼바이오는 브랜드 정비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전통 건강 매트 제품은 유서 깊은 브랜드 ‘십장생’을 유지하면서, 여름용 계절 제품은 ‘폴라베어’, 생활밀착형 소형 의료기기 전체에는 ‘영메디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십장생’은 별도 홈페이지를 통해 중장년 소비층을 겨냥하고, ‘폴라베어’는 쿨젤 매트, 애견용 냉감 패드 등 계절성 제품을 위한 감성 브랜드로 운영할 예정이며, ‘영메디칼’은 의료기기 본류로서 제품군의 통합 정체성을 유지한다는 구상이다.
브랜드를 용도별로 나눔으로써 소비자 혼란을 줄이고, 마케팅 집중도와 재구매율을 높이는 전략을 펴겠다고 권 대표는 설명했다.

2세 경영… 실전부터 시작하다
권영조 대표의 아들은 지난해 말부터 영메디칼에 합류했다. 대학을 졸업할 때 회사로 들어가냐고 물어봤지만 권 대표가 ‘유통을 배워야한다’고 강권해 B2B, B2C 분야에서 온라인 커머스 실무 경험을 쌓게 했다고 한다.
“제조는 내가 가르칠 수 있지만 유통은 밖에서 배워야 합니다. 현장도 겪어야 하고요. 머리만 쓰면 안 되고 몸도 같이 움직여야 하는 게 요즘 기업입니다.”
현재 권 대표의 아들은 실무 경험을 살려서 영메디칼바이오의 A/S와 물류, 상세페이지 관리까지 직접 맡고 있으며, 단순 관리자보다는 현장을 아는 차세대 경영자로 성장 중이다.
현재 챗GPT를 활용한 콘텐츠 자동화, 블로그 기반 숏폼 영상화 실험을 진행 중인 그는 앞으로 해외 유통망 확대, 브랜드 디자인 전략, AI 기반 마케팅까지 전담하게 될 예정이다.

실천, 책임, 그리고 지속
권 대표는 영메디컬이 지난 26년간 단 한 번도 월급이 밀린 적 없고, 협력사 대금도 체불한 적이 없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말했다.
“우리는 큰 기업이 아니니까 신뢰로 승부해야 해요. 말로만 하면 안 됩니다. 신뢰는 실천에서 나옵니다.”
26년간 권 대표를 움직이게 한 키워드는 ‘실천’이었다. 약속을 지키고, 말을 실천으로 증명하는 것이 중소기업의 유일한 브랜드 자산이라는 철학이다.
권 대표는 “남들을 따라가거나 무조건 ‘팔리는 걸 만들어야지’가 아니라,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걸 어떻게 팔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터뷰 말미에 ‘예비 창업자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묻자, 권 대표는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다.
“제품 하나에 미치지 않으면 절대 성공 못 해요. 구조를 이해하고, 끝까지 파고들어야 해요. AI, 챗GPT, 숏폼 다 좋습니다. 그런데 결국 중요한 건, ‘실행하는 힘’이에요. 나도 늦었지만 지금 배우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