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피알=김병주 기자 | 시각장애는 단순히 ‘볼 수 없음’의 문제가 아니다. 거리의 이동에서부터 스포츠, 예술, 일상적 쇼핑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든 영역에 보이지 않는 장벽을 만든다. 하지만 기업과 사회가 힘을 모아 이 벽을 허무는 다양한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누군가는 안내견을 통해 동행의 의미를 확장하고, 또 다른 이는 달리기라는 공동의 무대에서 시각장애인과 호흡을 맞춘다. 예술 작품을 손끝으로 느끼게 하는 전시도, 스마트폰 카메라로 상품 정보를 음성으로 알려주는 서비스도 그 맥락 안에 있다. 이 과정에서 함께 걷는 ‘동반자’의 개념과, 감각의 한계를 보완하는 AI 기술력이 두드러졌다.
삼성화재, 동아오츠카, 유니원, CU가 8월 한 달간 보여준 노력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한 방향을 가리킨다. 이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배려’라는 한정된 틀을 넘어 사회 전체의 인식 변화를 이끌고 일상의 권리를 확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건희 회장이 내다본 복지사회의 ‘삼성화재 안내견학교’
1993년,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신경영’을 선포하며 “장애를 가진 사람을 따뜻하게 품는 사회가 진정한 복지사회”라는 믿음을 강조했다. 그 신념 속에 세운 세계 유일의 기업 운영 안내견학교인 ‘삼성화재 안내견학교’가 지난 26일 경기도 용인에서 개교 32주년 기념식을 열었다.
삼성화재 안내견학교는 첫 안내견 ‘바다’를 배출한 1994년 이래 현재까지 308마리가 넘는 안내견을 시각장애인에게 분양했다. 현재 85마리가 전국에서 활동 중이다.
이날 행사에는 퍼피워커, 시각장애인 파트너, 은퇴견 입양가족 및 삼성화재 안내견학교 훈련사 등 안내견의 전 생애와 함께해 온 이들이 함께 했다.
안내견의 성장 뒤에는 퍼피워커, 은퇴견 입양 가족, 국회와 지자체, 정부기관 등 수천 명의 협력자가 있다. 생후 2개월 된 강아지를 1년간 돌보는 퍼피워킹, 은퇴견의 노후를 책임지는 홈케어까지, 지금까지 2800여 가구가 이 ‘함께 걷는 여정’에 참여했다.
고 이건희 회장은 이러한 노력을 인정받아 2002년 세계안내견협회로부터 공로상을 수상했다. 삼성화재 안내견학교는 지난해 대한적십자로부터 '적십자 인도장 금장'을 수상했다.
최근 보건복지부 등 정부와 국회는 안내견 동반인의 공공장소 출입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법률 개정을 이끌어냈다.
이문화 삼성화재 사장은 "안내견학교의 지난 32년간의 시간은 자원봉사자와 정부, 지자체 등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하나 된 걸음'으로 노력했기에 가능했다"며 "시각장애 파트너와 안내견이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사회적 환경과 인식 개선을 위한 노력도 함께 하겠다"고 말했다.

러닝으로 서로의 눈이 된 동아오츠카 ‘파랑달벗’
최근 러닝 트렌드로 한강변과 도심 코스를 달리는 인구가 늘고 있지만, 함께 뛰어줄 가이드러너가 마땅치 않은 시각장애 러너에게는 여전히 문턱이 높다. 러너와 가이드러너는 단순한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를 넘어, 서로의 목표를 향해 달리는 파트너이자 경쟁자라는 점에서 시각장애와 비장애를 잇는 공동의 접점이 형성된다.
동아오츠카는 자사 대표 음료 ‘포카리스웨트’를 통해 17년째 마라톤을 후원해온 경험을 토대로 2024년부터 ‘파랑달벗’ 프로젝트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나섰다. 특히 급증하는 러닝 인구 대비 시각장애인들의 활동 참가율이 낮다는 데서 착안, 국내 기업 최초의 가이드 러너 양성 프로젝트가 기획됐다.
‘세상을 파랗게 물들이며 함께 달리는 벗’이라는 이름처럼, 시각장애인과 가이드러너는 끈으로 손목을 연결하고 길 안내, 속도 조절, 주변 상황 전달 등을 주고 받으며 호흡을 맞춘다.
올해는 지난해의 두 배인 40명의 가이드러너를 양성한다. 그중 6명은 동아쏘시오그룹 임직원으로, 8주간의 훈련을 거쳐 오는 10월 ‘2025 서울달리기’ 대회에 시각장애인 러너 20명과 함께 완주를 목표로 뛴다. 일부는 내년 도쿄마라톤 풀코스에도 도전한다.
박철호 동아오츠카 대표이사 사장은 “지난해 시작한 파랑달벗 프로젝트가 올해 더 큰 관심과 참여 속에 확대돼 뜻깊다”며 “가이드러너 육성을 통해 더 많은 시각장애인의 러닝 참여를 돕고, 장애인 인식 개선과 생활체육 저변 확대에 기여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어두운 미술관’에서 피어난 촉각 예술, 유니원의 실험
문화예술을 즐기는 데 있어 시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격차는 여전히 크다. 실제 통계에 따르면 비장애인의 문화예술 비관람률은 23.9%인데 반해, 장애인은 64.5%로 2.7배에 달한다. “예술을 감상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경험조차 쉽게 닿지 못하는 현실이 있는 것이다.
유니원커뮤니케이션즈(이하 유니원)는 이 간극을 좁히기 위해 국내 최초로 시각장애인 맞춤 전시 ‘어두운 미술관’을 기획했다. 오는 9월 4일부터 7일까지 서울 대학로 이음센터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감각; 예술을 만나는 또 다른 방법’을 주제로, 기존의 ‘눈으로 보는 감상’에서 벗어나 손끝과 귀로 느끼는 예술 체험을 제공한다.
‘어두운 미술관’은 기술과 감각의 결합으로 장애·비장애의 경계를 허무는 실험이기도 하다. 시각장애인에게 새로운 예술 경험을 제공하고, 동시에 일반인에게도 감각을 달리 활용하는 새로운 몰입을 제안한다.
전시장에는 고흐, 피카소 등 세계 명화 20여 점이 3D 프린팅과 AI 알고리즘을 통해 촉각 작품으로 재현된다. AI가 원화의 붓질과 질감을 학습한 뒤 이를 입체화한 결과, 손으로 따라가면 원작의 붓터치와 질감, 명암까지 감각할 수 있다. 관람객은 촉각 유도선을 따라 작품을 탐색하며, AI 오디오 도슨트와 점자 캡션이 작품의 맥락과 의미를 안내한다.
현장 설계 또한 시각장애인의 관점에서 꼼꼼히 진행됐다. 전시장 동선과 작품 높이, 조도는 물론 안전 요소까지 검토했으며, 전시 티켓에는 점자와 음성 안내 QR코드가 포함됐다. 전문 성우의 화면해설 녹음도 제공돼, 손끝의 감각과 청각을 결합한 입체적인 감상을 가능케 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임혜리 유니원 콘텐츠 총괄책임자 상무는 "그동안 문화예술 분야에서 기획과 운영을 병행해오며 축적한 역량을 모아, 장애인의 예술 접근성을 실현하는 전시를 직접 추진하게 되었다"라며 "MICE 산업의 사회적 포용성과 문화다양성 확대의 모범사례로 확산되기를 기대한다"라고 밝혔다.
이번 전시는 유니원이 주최·주관하며 예술감독으로 임상우 박사(대구예술발전소, 충남대학교 겸임교수)가 참여하고, 한양대학교 ERICA 기계공학과가 작품제작에 협력한다.

AI가 읽어주는 상품 정보, CU의 쇼핑 편의성 혁신
CU를 운영하는 BGF리테일은 시각장애인의 쇼핑 편의성을 높이기 위해 AI 기반 시각 보조앱 '설리번 플러스'에 전용 기능인 'CU 모드'를 도입했다고 밝혔다.
해당 서비스는 소셜 벤처 '투아트'와의 협업을 통해 개발됐으며 안드로이드 버전 설리번 플러스 앱에서 이용할 수 있다.
기존에는 시각장애인 고객이 편의점에서 상품을 고르는 데 제약이 많았다. 동일한 용기에 담긴 음료는 맛이나 종류를 손으로 구분하기 어렵고, 점자 표기도 ‘음료’·‘맥주’ 등 일부에만 한정돼 있었다. 상품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은 포장 용기나 제한된 점자 표기에 국한돼 불편이 컸다.
해당 모드를 통해 고객이 스마트폰 카메라로 상품을 비추면 진열 위치·가격·행사 여부 등이 음성으로 안내된다. 시각장애인이나 저시력자들이 이미 활용 중인 설리번 플러스에 전용 기능을 얹어 접근성을 넓힌 것이다.
특히 이번 서비스는 일부 매장에 국한되지 않는다. 전국 1만 8600여 개 모든 CU 점포에서 동일하게 이용 가능해, ‘배리어 프리 점포’라는 제약을 넘어선다. 이를 위해 CU는 지난 5월 한국장애인개발원과 함께 시각장애인 체험단을 구성해 실제 이용 패턴을 분석했고, 인터뷰와 시연 테스트에서 나온 의견을 반영해 기능을 다듬었다.
최민건 BGF리테일 ESG팀장은 "여러 차례에 걸친 시각장애인 인터뷰, 시연 테스트 등에서 도출된 의견을 듣고 CU 모드에 반영했다"며 "이번 서비스가 시각장애인 고객들에게 편의점 이용에 대한 심리적 허들을 낮출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