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피알 매거진

SK, 구조중심 성장 공식…SKMS부터 R&BD까지

리밸런싱 본질은 구조 다시 짜는 일
변화의 속도는 조직문화가 정한다
소통이 곧 구조를 움직이는 엔진이다

  • 기사입력 2025.11.24 08:00
  • 최종수정 2025.11.24 11:49
  • 기자명 김경탁 기자

[편집자주] SK하이닉스가 승승장구하고 있다. 2012년 인수 당시 ‘위험한 베팅’으로 불리던 결정은 13년 만에 한국 산업 구조를 바꾼 상징이 됐다. 본 기획은 글로벌 대형펀드들이 주목하는 이 언더독 신화를 통해, ‘제조의 피를 다시 흐르게 한 결단’이 오늘의 성과로 이어진 과정을 짚어본다. 상편에서는 최태원 회장의 결단과 세대를 잇는 산업 서사를 다뤘고, 하편에서는 리밸런싱과 밸류에이션으로 확장되는 SK의 미래 전략을 분석한다.

먼저 읽을 기사 : SK家 선대회장 미완의 꿈, 최태원 회장이 완성하다

더피알=김경탁 기자|SK그룹은 지금 경제 대전환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SK하이닉스, SK텔레콤, SK이노베이션, SK온, SK에코플랜트, SK케미칼, SK브로드밴드, SK바이오 등 전 계열사에 걸쳐, 반도체, AI 인프라, 에너지 전환을 향한 초대형 투자가 진행중이다.

초연결·초격차를 말하는 시대에 SK가 꺼내 든 무기는 운영 구조, 본업 지식, 조직의 정렬이다. 기술보다 체질, 확장보다 기반을 먼저 점검하는, “이 변화들을 받아낼 구조가 갖춰져 있는가”라는 질문이 SK의 다음 10년 전략을 관통하는 출발점이다.

최태원 SK회장이 11월 6일부터 8일까지 경기도 이천 SKMS연구소에서 열린 '2025 SK그룹 CEO세미나'에서 클로징 멘트를 하고 있다.
최태원 SK회장이 11월 6일부터 8일까지 경기도 이천 SKMS연구소에서 열린 '2025 SK그룹 CEO세미나'에서 클로징 멘트를 하고 있다.

구조에서 출발한 SK의 성장 공식

기업사 전문가들은 SK의 성장공식을 “기술이 아니라 구조에서 출발하는 방식”으로 정리한다.

이지환 카이스트 교수는 “SK는 기술을 구조 속에서 판단하는 특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기술이 사업·시장·조직과 어떤 구조로 결합해 실제로 작동하는지를 우선 검토한다는 뜻이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장치가 SK 특유의 R&BD(Research & Business Development, 연구개발 및 사업화) 모델이다.

연구를 끝내고 나서 사업성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연구 초기에 시장·고객·수익 구조를 함께 설계하는 방식이다. 기술·생산·영업·기획이 서로 다른 논리로 움직이지 않도록 처음부터 구조를 맞춰 두는 운영 체계다.

구조 중심 사고는 SKMS(SK Management System)와 결합해 그룹 전반의 판단 틀로 자리 잡았다. 기술·생산·영업·기획이 각자 다른 기준으로 움직이면 비용과 리스크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는 장치산업 특성상, 하나의 프레임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시스템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권오용 전 SK그룹 PR총괄 사장은 SKMS를 “성문화된 기업문화”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 문화가 몸에 밸 때 비로소 구조적 판단이 일관성을 가진다”고 말했다. 정교한 시스템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시스템을 흡수해 움직일 수 있는 문화적 토대라는 설명이다.

1970년대 최종현 선대회장이 만든 SKMS와 수펙스 추구법은 SK가 업황이나 유행보다 장기 구조를 먼저 보는 기업으로 성장하는 기반이 됐다.

기업가 정신 전문가인 이춘우 서울시립대 교수는 “SK는 미래를 예측하기보다 미래를 떠받칠 구조를 먼저 해석하는 기업”이라고 설명했다.

섬유 산업 시절의 수직계열화, 오일쇼크 혼란 속에서의 정유 사업 진출, 수익이 보장되지 않던 시기의 통신 인프라 구축, 시장이 외면하던 SK하이닉스 인수까지, SK의 모든 큰 결정에는 “이 산업은 앞으로 어떤 구조로 움직일 것인가”라는 질문이 있었다고 이 교수는 분석했다.

특히 SK하이닉스 인수는, SK하이닉스를 ‘미래가 불투명한 제조기업’으로 보던 시장과 다른 관점을 보여줬다. SK는 데이터 시대가 본격화되면 메모리가 구조적 병목의 핵심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특정 기술의 우열이 아니라, 산업 전체의 구조 재편을 읽어낸 선택이었다.

이춘우 교수는 이를 시장 전체가 비관적이던 시기에도 미래 산업 구조를 먼저 읽어낸 기업가적 판단으로 평가하고, 상상력과 탐구심을 바탕으로 미래를 구현해온 SK 리더십의 전형이라고 설명했다.

최태원 SK 회장이 2019년 1월 서울 종로 SK서린빌딩에서 열린 ‘행복 토크’에서 구성원들과 행복키우기를 위한 작은 실천 방안들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최태원 SK 회장이 2019년 1월 서울 종로 SK서린빌딩에서 열린 ‘행복 토크’에서 구성원들과 행복키우기를 위한 작은 실천 방안들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소통은 ‘구조를 세우는 공정’…SK하이닉스 이후가 증명한 것

SKMS의 1979년 초판에서 SK의 경영이념은 ‘이윤극대화를 통한 영구 존속과 발전’이었다.

2004년 개정에서 ‘이윤 극대화’라는 문구는 ‘행복 극대화’로 바뀐다. 단어 교체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무엇을 위해 구조를 정렬할 것인가’라는 기준 자체를 바꾼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 인수과정에 참여했던 권오용 전 사장은 “소통비용을 아끼지 말라는 지시가 위에서 있었다”며 “그룹의 한 원로는 인수가격의 10%는 커뮤니케이션 비용으로 써도 좋다고 할 정도였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실제 SK하이닉스 인수 이후 SK가 가장 공들인 것은 PMI(Post-Merger Integration, 합병 이후 통합)였다. SK의 PMI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비용 효율화 중심의 통합이 아니라, SKMS·수펙스·R&BD 기반의 운영 원칙을 SK하이닉스에 이식해 조직 전체의 판단 기준을 정렬하는 데 초점이 있었다.

기술·생산·영업이 각기 다른 기준으로 움직이던 구조를 하나의 운영 프레임으로 통합하는 과정이었고, 이후 HBM 개발과 AI 메모리 전환 등 전략적 결정의 밑거름이 됐다.

특히 SK에게 소통은 전략의 부속이 아니라 구조를 완성하는 핵심 공정이었다. 하이닉스 인수의 성공 여부를 ‘가격’이 아니라 ‘정렬된 구조가 실제로 돌아가는가’로 봤다는 얘기다.

이후 HBM 개발과 AI 메모리 전환 과정에서도 R&BD 체계와 본업 지식 중심 운영, 그리고 소통중시 문화는 그대로 이어졌다. 오늘의 하이닉스가 보여준 반전은, 구조 중심 경영이 단기 성과를 넘어 장기 경쟁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증거다.

리밸런싱, ‘줄이기’가 아니라 구조를 다시 짜는 일

최근 SK가 추진하는 리밸런싱(Rebalancing)은 겉으로 보기엔 단순한 사업 재조정으로 비친다. 그러나 내부에서 보는 리밸런싱의 의미는 다르다.

한 SK 고위 관계자는 “리밸런싱의 큰 흐름은 마무리됐고, 이제는 본업 지식과 운영 체계, 역할 간 정렬을 다시 세우는 단계”라고 말했다. 비용 조정이나 선택과 집중이 아니라, 조직이 변화의 속도를 감당할 수 있는 몸체인가를 점검하는 과정이라는 의미다. 이 지점에서 자주 등장하는 키워드가 본업 지식(Domain Knowledge)과 O/I(Operation Improvement, 운영 개선)다.

이지환 교수는 기술 자체보다 조직의 본업 지식·운영 체계·정렬 구조가 기술 전환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강조했다. 기술은 늘 쏟아지지만, 조직 내부의 구조·정렬·체질이 준비되지 않으면 그 기술은 전환이 아니라 부담이 된다는 뜻이다.

권오용 전 사장은 “SK의 역대 M&A 이후를 보면 변화의 폭이 커도 조직이 흔들리지 않는다”며 “구조 조정과 본업 지식 재정렬이 가능한 이유도, 그 구조를 흡수하는 기업문화가 이미 자리 잡아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SK는 단순히 사업을 옮기거나 줄이는 기업이 아니라, 구성원 전체가 같은 언어와 기준으로 움직이도록 설계된 조직이라는 설명이다.

11월 3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SK AI SUMMIT 2025'에 AI데이터센터가 전시되어 있다.  뉴시스
11월 3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SK AI SUMMIT 2025'에 AI데이터센터가 전시되어 있다. 뉴시스

AI는 기술 경쟁이 아니라 구조 경쟁

AI는 지금 산업의 표면을 가장 빠르게 흔드는 기술이지만, SK는 AI를 사양이나 기능 경쟁이 아닌 구조의 문제로 본다. AI가 실제로 작동하려면 메모리–전력–데이터센터–냉각–보안–연결망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구조가 함께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최태원 회장은 “AI 병목은 결국 메모리–인프라–솔루션에서 발생하며, 이는 기술이 아닌 구조 문제”라고 지적한 바 있다. AI 확산 속도가 기술 그 자체보다 전력, 냉각, 메모리 대역폭 등 인프라 병목에서 좌우된다는 현실 인식이다.

SK가 추진하는 AI 인프라 전략도 이 관점에서 읽힌다.

국내 최대 AI 컴퓨팅 클러스터 ‘해인(Haein)’ 구축은 SK텔레콤이 생성형 AI 서비스 경쟁력과 연구·실험 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연산 플랫폼 구축 성격이 강하다.

아마존웹서비스(AWS)와 함께 울산에서 추진 중인 ‘SK AI 데이터센터’는 AI·클라우드 수요 증가에 대비한 전력·입지 기반 인프라 확충 및 글로벌 클라우드와의 생태계 연동에 가깝다.

OpenAI와의 서남권 AI 데이터센터 프로젝트는 GPU·AI 연산 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대규모 자본·기술 협력 및 글로벌 파트너십 구축 성격이 두드러진다.

성격과 목적은 각기 다르지만, 공통점은 하나다. 이들 프로젝트가 단순히 “최신 기술을 빨리 들여오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AI 시대에 필요한 구조를 어떤 방식으로 설계하고 확보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라는 점이다.

이지환 교수 역시 AI는 기술 경쟁이 아니라, 누가 더 빨리 배우고 더 빠르게 실행 구조를 정렬하느냐의 문제라고 진단했다. AI 전략은 기술 리스트를 나열하는 일이 아니라, 그 기술이 실제로 작동할 수 있도록 기업 내부와 외부의 구조를 재설계하는 일이라는 의미다.

10월 31일 경북 경주시 경주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CEO 서밋에 참석한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최태원 SK그룹 회장 겸 대한상의 회장으로부터 SK하이닉스의 HBM4 반도체 웨이퍼를 선물로 받고 있다.
10월 31일 경북 경주시 경주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CEO 서밋에 참석한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최태원 SK그룹 회장 겸 대한상의 회장으로부터 SK하이닉스의 HBM4 반도체 웨이퍼를 선물로 받고 있다.

“생장점이 멈추면 기업도 멈춘다”…SK의 다음 10년

이춘우 교수는 SK의 경영을 “안정과 성장이라는 두 축 위에서 지속 가능한 혁신을 추구해온 진보적 경영철학”으로 설명했다.

그는 기업가정신을 ‘나무의 생장점’에 비유하며 “생장점이 멈추면 생명도 멈춘다. SK의 성장사는 이 생장점을 유지해온 역사”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또 “SK는 미래를 상상하고 학습하는 조직 문화가 이미 구축돼 있어 AI 전환기의 속도와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반을 갖추고 있다”며 “젠슨 황이 GPU라는 언어로 산업을 재정의했듯, SK도 AI를 SK의 철학으로 규정하는 언어적 주도권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지금 SK가 추진하는 초대형 투자는 단순한 규모 경쟁이나 속도 경쟁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SK가 반복적으로 던지는 질문, “우리의 구조는 이 변화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는 확장을 막는 제동이 아니라, 확장을 가능하게 만드는 출발선에 가깝다.

최근 SK 전략에서 등장하는 여러 키워드는 결국 ‘구조’라는 하나의 메시지로 수렴한다.

SK하이닉스의 성공은 이러한 구조 중심 사고가 만들어낸 성취의 한 사례일 뿐이다.

미래는 빠르게 기술을 도입하는 기업이 아니라, 견고한 구조를 갖춘 기업에게 먼저 열릴 것이다. SK는 지금, 새로운 시대에 맞는 골격을 다시 세우는 작업에 차근차근 매진하고 있다. 그 구조가 확고히 다져질 때, AI, 반도체, 인프라 등이 비로소 제 기능을 발휘하며 성장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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