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피알 = 오승호 편집인 | 현재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약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일본은 1970~1980년대 초중반까지는 반도체 최강 미국을 누르고 시장을 석권하다시피 했다. 최강자 미국이 반도체의 생산성이나 수익성에서 매우 중요한 수율을 등한시했던 게 일본에게 추월당한 원인의 하나라는 분석도 있다.
일본은 1970년대 석유 파동과 1980년대 정부 주도 조선사업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산업에 대해 고민하던 끝에 메모리 반도체를 성장 동력으로 집중 육성했다. 일본은 미국이 자신감에 빠진 나머지 불량률의 반대 개념인 양품률, 즉 수율에 신경 쓰지 않으면서도 반도체 가격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보고는 반도체를 정교하게 만드는 전략을 펴 성공하게 된다.

미국 인텔 등에 비해 수율도 높고 가격도 10%나 낮게 납품하는 등 세계 시장을 거침없이 잠식해 나간다. 일본의 공격적인 덤핑 공세로 미국의 반도체 업체들은 메모리 시장에서 철수하기에 이르고 만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당시 세계 반도체 시장을 주름잡던 10대 기업 가운데 일본은 도시바, 미츠비시 등 6곳이나 포함될 정도로 강자였다.
급기야 미국은 정부 주도의 반도체 투자 등을 문제 삼아 도시바 등 일본 반도체 기업 7곳을 덤핑 혐의로 무역대표부(USTR)에 제소하는 등 통상 압력을 가했고, 일본은 미국과 협상 테이블에 앉아 양자협정문에 서명하게 된다.
일본은 1986년에 체결된 미일반도체 협정으로 일본에서 소비하는 외국산 반도체 비율을 1992년까지 20%로 높이고, 반도체 덤핑 수출도 중단하기에 이른다. 이 협정은 연장을 거쳐 1996년 종결됐고, 일본의 반도체 기업들은 회생 불능 상태로 빠져들었다. 그 여파로 일본은 소재, 부품, 장비(소부장) 중심으로 산업을 재편하게 된다.
이러는 사이 신흥강자 삼성은 대용량이면서도 가격은 싼 메모리 반도체 생산에 주력했다. 때마침 인텔과 마이크로소프트 덕분에 PC시장은 폭발했고, 대용량이면서 가격이 저렴한 메모리 수요는 급증했다. 삼성전자의 반도체가 시장에서 먹혀들어가면서 반도체 산업은 삼성의 메모리 기준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일본의 반도체 업체들은 인수합병 등을 통해 반전을 모색하지만 그 효과를 누리지 못했고, 대만 기업들에 인수되기 시작하는 등 회복 불능 상태에 빠지게 된다.
2023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반도체 산업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다. 메모리는 세계시장의 61%를 점유하고 있다. 주력 제품인 D램은 73.5%로 글로벌 시장의 지배력을 유지하고 있다.
외환위기가 발생한 1997년 우리나라의 세계 반도체 시장 점유률은 7%였다. 2003년까지는 한자릿수에 그쳤다. 다음해인 2004년 10%로 올라선 뒤 2018년에는 24%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2023년에는 점유율이 13.2%로 떨어지긴 했지만 메모리 반도체 부문에서는 우리나라가, 시스템 반도체 부문에서는 미국의 경쟁력이 계속 유지되고 있다. 일본은 반도체 세계 시장 점유율 8.7%로 약세를 이어가고 있고, 대만은 6.3%로 경쟁력이 높아지고 있다.
반도체는 산업의 쌀로 불리운다.
컴퓨터, 자동차, 스마트폰, 로봇, 각종 통신장비 등 대분분 기기에 반도체가 들어가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점은 반도체 산업이 앞으로 더 중요해 진다는 사실이다. 인공지능(AI)을 비롯한 4차 산업 혁명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로봇, 자율주행차, 드론 등 4차 산업 혁명하면 떠오르는 기술에 반도체는 필수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위기의 한국 반도체, 골든타임은 2년
우리가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선도하고 있지만 시스템 반도체(비메모리) 시장에 도전하는 것도 인공지능이 중요해 지면서 정보를 제어하고 처리하는 시스템 반도체가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메모리는 22.6%, 비메모리는 77.4%를 차지한다. 시스템 반도체가 주력이지만, 우리나라의 이 분야 글로벌 시장 점유율은 3.3%에 그치고 있다. 대만(10.3%), 일본(9.2%), 중국(6.5%)과 격차가 크다.
전문가들은 시스템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서는 물리, 전자, 화학 등에 기반한 소프트웨어(SW) 인력 양성과 R&D 투자 확대가 필요하다고 주문한다. 메모리 반도체와 AI 등 전체의 청사진 안에서 시스템 반도체 전략을 펴야 한다는 것이다.
미중 무역 갈등 등으로 반도체 전쟁으로 불리울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다. 반도체는 2024년 우리나라 전체 수출액에서 22%를 차지할 정도로 수출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이런 흐름이 이어질지 불투명하다.

한국공학한림원 반도체특별위원회는 지난 12월 18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연구결과 발표회를 통해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이 역사상 최대 위기에 놓였다고 진단했다.
전세계 반도체 산업이 국가 대항전으로 접어든 상황에서 한국은 기술 및 투자 경쟁력 약화, 인재 유출, 불필요한 규제 등에 발목이 잡혔다면서 1년 6개월~2년 안에는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이다.
국민의힘은 2일 반도체특별법 등 미래 먹거리 사업 법안을 1월 중 국회에서 일괄 처리하자고 제안했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은 반도체법 제정에는 뜻을 같이 하고 있으나 담을 내용에서는 의견이 엇갈려 지난해 처리하지 못했다.
반도체 산업에서 신상품이나 연구개발 업무 종사자에게 주 52시간 근무 상한제 적용 제외 조항을 법안에 넣은 부문이 쟁점이다.
국민의힘은 미국은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일본은 고도 프로페셔널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데 우리라고 이 제도를 도입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강조한다.
이에 대해 민주당은 특별연장근로제를 활용하면 된다면서 수용하기 힘들다는 입장이다. 현행 근로기준법은 업무량 폭증이나 연구개발처럼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 근로자의 동의와 고용노동부장관의 인가를 받아 주 52기간을 초과해 연장근로를 할 수 있게 돼 있다.
어떤 제도이든 노사 양측 또는 경제 주체 모두 만족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대화와 타협을 통해 최적의 대안을 찾는 것이 정치이다. 경제 상황을 고려할 때 반도체특별법은 가장 시급한 법안의 하나일 것이다. 법안 내용을 좀 더 촘촘히 하는 등 현행 제도와 차별화할 수 있게 하면 반도체특별법이 여야 합의로 처리되는, 을사년 새해 1호 법안이 될 수 있다고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