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피알=오승호 편집인 | 반도체특별법 제정이 난항을 겪고 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국회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한 지난 10일 찬반론이 극명하게 갈렸다.
IT기업인 출신인 안철수·고동진 국민의 힘 의원은 국회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반도체특별법 없이는 인공지능(AI)도 대한민국의 미래도 없다”면서 “주52시간제 예외를 적용하는 특별법을 통과시키는데 협력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들은 “우리는 얼마 전 겪었던 딥시크 쇼크를 통해 혁신 경쟁에서 잠시라도 방심하면 뒤처진다는 점을 목도했다”면서 ”반도체 분야와 같이 글로벌 경쟁이 치열한 분야에서는 노동시간에 대한 유연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재명 대표가 국회 연설에서 반도체특별법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은 점을 비판하는 자리였다. 이 대표는 특정 영역의 노동 시간을 유연화해도 그것이 총노동시간 연장이나 노동 대가 회피 수단이 되면 안 된다고 밝히기만 했다.
같은 날 민노총 등은 ‘반도체특별법 저지 및 노동시간 연장 반대 공동행동’ 출범식을 갖고, 특별법을 제정하게 되면 노동시간이 늘어난다면서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반면 권성동 국민의 힘 원내대표는 11일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전세계에서 반도체 연구 인력이 주52시간 근무에 발목 잡힌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면서 2월 국회에서 특별법을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딥시크 쇼크를 계기로 민주당도 2월 중 특별법을 처리할 기미를 보였다. 그러나 특별법의 핵심인 주52시간 근무 예외 조항은 일단 제외할 분위기여서 여야 합의 처리는 난망해 보인다.
반도체특별법 처리는 근로시간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좁혀지지 않는 한 쉽지 않을 것 같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10년 전만해도 1인당 연 평균 근로시간(2113시간)이 멕시코에 이어 두 번째로 많았다. 2015년 OECD 평균은 1766시간으로 우리나라가 347시간 길었다.
그러나 2022년 기준 우리나라는 1901시간으로 OECD 평균(1752시간)과의 격차는 149시간으로 좁혀졌다. 우리나라는 콜룸비아(2381시간), 멕시코(2335시간), 코스타리카(2242시간), 칠레(2026시간), 이스라엘(1906시간) 다음으로 근로시간이 길다.
근로시간 통계는 한국이 장시간 근로 국가임을 뒷받침하는 논거로 활용되곤 한다. 하지만 국가마다 취업형태 구성이 다르기에 이에 대한 고려 없이 단순 비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지적도 있다.
OECD도 2023년에 연간 근로시간 통계치의 국가 간 단순 비교를 지양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OECD 통계의 목적은 한 국가의 총노동 투입량을 측정하는 것이지, 국가 간 장시간 근로 현황을 비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들어서다.
한국개발연구원(KDI) 김민섭 연구위원은 2023년 12월 발표한 ‘OECD 연간 근로시간의 국가 간 비교분석과 시사점’에서 “OECD 30개국을 분석한 결과 자영업자 비중이 1%포인트 증가할 때 해당 국가의 1인당 연간 근로시간은 10시간 안팎 늘어났다”고 밝혔다. 반대로 주당 근로시간이 30시간 미만인 시간제 근로자 비중이 1%포인트 증가하면 연간 근로시간은 9시간 가량 감소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자영업자 비중은 2021년 기준 23.9%로 OECD 30개국 평균(17.0%)보다 훨씬 높다. 반면 시간제 근로자 비중은 12.9%로 OECD 평균(14.3%)보다 낮다. 이런 취업형태의 차이를 고려하면 OECD 회원국 평균치와의 격차는 더 좁혀질 수 있다는 얘기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는 임금근로자와 자영업자까지 포함해 주된 일자리에서 30시간 이상 일하는 풀타임 취업자를 기준으로 한 2022년 주당 평균 실근로시간은 43.2시간으로 OECD 평균(41.7)과의 격차는 1.5시간에 불과하다고 밝힌 바 있다.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조사를 보면 장시간 근로를 하는 비중은 해마다 줄어드는 추세다. 임금근로자 가운데 주 48시간(주업+부업)을 초과하는 장시간 근로자 비율은 2004년 53.7%였으나 2010년 45.5%, 2015년 34.4%, 2020년 20.0%, 2023년 17.9%였다.
우리나라가 장시간 근로 국가인지 아닌지에 대한 정답을 찾으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근로시간이 해를 거듭할수록 줄어드는 등 노동 여건이 많이 개선되고 있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이제는 정책의 패러다임이 장시간 근로 보다는 근로시간의 유연화와 생산성 제고 쪽으로 바뀌어야 하는 시대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영국 토터스인텔리전스의 2024년 9월 글로벌지수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AI 경쟁력은 세계 83개 국 가운데 6위다. 스위스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의 세계디지털 경쟁력 순위도 67개국 중 6위를 차지했다.
AI시대, 디지털 시대를 맞아 노동시장은 많은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AI 기술에 따른 일자리 변화, AI 기술과 윤리적인 문제, 일자리 감소에 따른 사회 안전망 구축 등 숱한 과제가 놓여 있음을 노사정 모두 인식해야 할 때다.
우리나라 수출 1위 품목인 반도체는 지난 1~10일 기준 전체 수출의 19%를 차지했다. 우리나라의 가장 큰 먹거리인 반도체 산업은 중국의 거센 추격과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압박까지 겹치면서 최대 고비를 맞고 있다.
반도체가 다시 훨훨 날 수 있게 해야 한다.
지난해 11월 28일 삼성전자 평택공장에서 고용노동부 주최로 열린 반도체협회 초청 간담회에서 참석자들은 우리나라 근로시간 제도가 반도체 연구개발처럼 특수한 분야에 유연하게 활용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반도체 분야 연구개발 현장의 현실과 관련해서는 “지난 10년 동안 근로시간 정책에 따라 당일의 업무량에 적합한 일을 우선한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개발 및 평가는 뒤로 미루게 되거나 또는 미흡하게 진행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반도체 소부장 분야 석·박사 과정 대학원생들은 “근로 시간이 보장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나, 현실적으로 주52시간 근무라는 것은 사무직이나 일반직에게 유효한 정책인 것 같다”고 했다.
첨단산업 기술 개발을 하는 엔지니어는 학생 때부터 집중화된 연구 시간에 대한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고, 본인이 하겠다는 생각이 있는 사람을 근로 시간의 제약으로 경쟁력을 잃게 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지적도 나왔다.
반도체는 제품 개발 주기에 따라 초기 개발에는 업무량이 많지 않지만 중반 이후 성능검증을 거쳐 제품화를 하기 위한 시기에는 집중 연구가 필요하다고 한다. 융통성 있는 근로시간 확보가 필요한 업종이다.
외국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성실하고 머리가 좋으며 신속하게 일을 처리한다는 평가를 한다. 빨리 빨리 문화는 한국인의 특성으로 자리 잡았다.
일률적인 근로시간 규제는 생산성 측면에서 한계가 있다. 근로시간 형태의 다양화가 가능해야 한다. 반도체업계는 오후 6시만 되면 반도체 첨단 연구개발(R&D) 인력들이 모두 퇴근해야 하는 게 현실이라고 호소한다. 이들이 마음껏 일할 수 있게 제도적인 뒷받침을 하는 것은 요원한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