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피알=오승호 편집인 | 지금으로부터 31년 전 필자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우루과이 라운드(UR) 쌀 협상 취재 현장에 있었다. 우리나라 대표단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제네바에 도착한 이후 보름 이상 현지에서 불꽃 튀는 취재 경쟁을 벌였다.
그 당시만 해도 쌀 시장 개방이란 말은 쉽게 꺼내기 힘들 정도로 쌀에 대한 국민의 관심은 지대했다. 서울에서는 농민과 농민단체 등 쌀 시장 개방 반대 대규모 집회가 그치지 않았고, 제네바 협상장 주변에선 야당 국회의원 2명이 삭발을 하기도 했다.
농협 직원 10여명은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정문에서 쌀 시장 개방 반대 혈서도 썼다. 여의도 국회 예결위원회의장에선 출석한 경제부총리에게 매국노라는 욕설까지 한 국회의원도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협상 대표단은 쌀 시장 개방 반대 정서를 무기로 방어에 나섰지만 쌀 시장 개방을 완전히 막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시장 완전 개방은 아니었지만 10년 동안 국내 쌀 소비량의 1~4%를 의무적으로 수입하는 선에서 협상을 매듭지었다.
당시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김영삼 대통령은 쌀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 쌀 시장 개방의 불가피성을 밝혔고, 이를 막지 못한데 대해 대국민 특별담화를 통해 사과했다.
협상 대표단장이었던 허신행 농림식품부장관은 미국 농무장관과 최종 담판을 통해 합의안을 도출해 낸 뒤 기자회견에서 “지옥에 갔다온 기분이다. 미국과의 협상이 이렇게 어려울 줄 몰랐다”고 협상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결국 1993년 12월 15일 7년여의 난항 끝에 UR 협상은 타결됐고, 우리나라는 1995년 5만톤을 시작으로 매년 미국과 중국, 베트남, 호주, 태국 등에게서 쌀을 수입하고 있다.
2014년까지 20년 동안 부분 개방을 한 뒤 2015년부터는 매년 5%의 관세율을 적용해 40만 8700톤의 외국산 쌀이 국내로 들어오고 있다. 이를 초과하는 물량은 513%의 높은 관세를 적용하는 방식으로 쌀 시장의 빗장은 완전히 열려 있다.

세월이 흘러서일까.
쌀 소비량이 줄어드는 만큼이나 식량 안보 최후의 보루인 쌀에 대한 관심은 식어가기만 하는 것 같다. 아무리 쌀이 넘쳐난다해도 푸대접을 받을 식량은 아닌데 말이다.
1970년 국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136.4kg으로 정점을 찍은 이후 1998년에는 99.2kg으로 100kg을 밑돌더니 2023년엔 56.4kg까지 떨어졌다. 정부는 2029년에는 52kg 안팎을 기록할 것으로 내다본다. 쌀 10kg 한 포대 소비자 가격이 3만원대 중반~5만원선이니 1년에 쌀 값으로 한 사람이 치르는 비용은 20만원 안팎이라는 얘기다.
쌀 소비량이 해를 거듭할수록 줄어들다보니 정부가 국민 세금으로 농가 등에서 웃돈을 주고 쌀을 사들여 보관하고, 수입한 쌀을 되파는데 드는 비용은 천문학적이다. 수요공급의 차이 때문이다. 2023년에는 그 비용이 1조 7700억원이나 된다고 한다.
아련히 머릿 속에 남아 있는 추곡수매제가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에서 감축보조 대상으로 2005년 폐지된 이후 정부는 공공비축제를 도입했다. 시장 상황에 따라 탄력적으로 쌀을 사들인 다음 주정용이나 사료용 등으로 쓰고 있다. 지난해엔 45만톤을 매입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쌀 소비를 늘리든지, 아니면 쌀 재배 면적을 줄이든지 하는 방법 밖에 없을 것이다.

농협중앙회는 지난해 11월 중국 광동성 혜주시에서 중국의 농협격인 광동성 공소합작연합사와 쌀 1000톤 수출 계약을 체결했다. 우리나라의 10년 평균 쌀 수출량 2000톤 가량에 불과한 것에 비하면 적은 물량은 아니지만 넘치는 쌀을 해소하기엔 미미한 수준이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벼 재배 면적은 69만 8000헥타아르(ha)로 2029년까지 8만ha를 줄여야 하는 상황이다. 쌀 대신 대부분 수입에 의존해 자급률이 낮은 밀이나 콩, 깨 등의 작물을 심게 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정부도 쌀 산업의 구조적 공급 과잉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쌀 대신 다른 작물을 재배하는 농가에 자금을 지원하는 전략작물직불제를 시행하고 있으나 성에 차지 않는 상황이다.
쌀 품종이지만 전분 구조는 밀과 유사한 새로운 식품 원료인 가루쌀을 활용한 가공식품 개발로 쌀 소비 확대도 꾀하고 있다. 농식품부는 2023년부터 지원에 나섰는데 지난해엔 30개 식품기업이 사업에 참여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농가 인구는 2002년 359만명에서 2023년에는 219만명으로 줄어들었다. 2032년엔 194만명으로 감소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65세 이상 농가 인구 비율은 지난해 46%이고, 2032년에는 52%에 이를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농가 소득은 도시근로자의 60% 수준이다. 지역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국회에서 양곡관리법과 농수산물가격안정법, 농어업재해대책법, 농어업재해보험법 등 농업4법의 처리와 관련해 마찰을 빚고 있다. 앞서 한덕수 전 대통령권한대행은 지난 12월 농업4법 등 6개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한 바 있다.
논란의 핵심은 양곡관리법 개정안이다. 쌀이 초과 생산되거나 기준가격 미만으로 떨어질 경우 정부가 초과 생산량 전량을 매입하게 하는 조항과 관련해서다.
지자체들은 쌀 값 안정을 위해 벼 재배 면적 줄이기에 나서고 있다. 세종시는 벼 재배면적의 12%에 해당하는 373ha를 줄일 목표로 지난 2일 의견 수렴을 위한 간담회를 갖기도 했다.
쌀 공공비축에 들어가는 비용이 2030년에는 3조원에 이를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쌀 산업이 더 이상 시장 격리에 의존하게 해선 안 된다. 벼 재배 면적을 줄이는 동시에 첨단 기술을 활용한 스마트농업, 고품질 쌀 생산, 친환경 벼 재배 확대 등을 통해 농촌이 살아나게 해야 한다.
이런 쪽으로 국민 세금이 집중 투입되어야 하지, 벼 재배를 줄이지 않게 하는 유인책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래야 농업인들이 살고, 청년들이 농촌으로 유입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