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피알=박주범 기자|여자니까 혈우병은 아니라고요?
다음달 콜로라도에서 열리는 미 출혈장애재단(NBDF) 컨퍼런스에서 초연될 예정인 다큐멘터리 영화 <디스미스드(Dismissed)>는 여러 세대에 걸쳐 무시 당하고, 오진 받고, 치료 받지 못한 채 방치되어 온 혈우병(hemophilia) 여성 환자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영화에는 다섯 명의 여성들이 등장하는데,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15세 소녀 이사벨은 조기 치료를 받은 희귀한 사례로 이제 다른 사람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 외에 출혈성 질환이 있음에도 계속 명확한 치료 계획을 기다리고 있는 임산부 케이트, 의사에게서 진단을 받지 못해 예방 가능한 합병증으로 부분 마비된 킴벌리, 그리고 혈우병을 앓고 있는 두 아들을 둔 에리카가 나오는데, 그녀는 자신의 오랜 증상이 진단되지 않은 혈우병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또, NBDF의 최고운영책임자로 환자들을 대변하는 경증 혈우병 환자인 던도 아들이 혈우병을 갖고 있다.
혈우병은 X 염색체에 있는 유전자의 선천성, 유전성 돌연변이로 인해 혈액 내의 응고인자가 부족하게 되어 발생하는 출혈성 질환이다.
X 염색체에 생기는 유전 질환이라는 이유로 과거에는 일반적으로 증상이 남성에게만 발현되며, 여성은 단순히 유전자를 전달하는 양성 보인자일 뿐이라고 오인되었다.
과학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점점 더 많은 연구에서 여성들도 실제로 증상이 있음이 밝혀지고 있으나 여전히 혈우병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지 않아 적절한 진단과 치료를 받지 못해 고통 받는 여성 환자들이 많다.
영화 제작진이 인용한 통계에 따르면, 미국 만성 통증 환자의 70%가 여성이지만 혈우병 임상 시험의 80%가 남성만을 대상으로 하며, 의료 서비스 제공자의 약 60%가 혈우병 여성의 진단 지연을 보고했다.
또, 혈우병 여성의 92%는 경증 질환을 앓고 있지만 남성보다 진료실을 덜 방문하는 등 연구실부터 진료실까지, 여성 건강이 체계적으로 소외되어 왔다. 영화는 이러한 수치가 보여주는 남성 중심적인 의료 시스템에서는 여성의 통증이 무시되고 질병이 제대로 인식되지 않음을 알린다.
감독인 벨라 개즈비(Bella Gadsby)는 성명을 통해 "이번 영화를 만든 환자 참여기관인 '빌리브 리미티드(Believe Limited)'에서 일하면서 옹호 활동과 스토리텔링의 힘을 직접 목격했다"라고 털어 놓으며, "이 영화는 단순히 혈우병에 관한 것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체계적인 침묵과 서사를 바꿔야 할 시급한 필요성에 관한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신뢰 있는 의료사이트 정보도 정확하지 않아
실제로 관련 단체에 따르면, 여러 의료 웹사이트들이 여전히 혈우병 뿐 아니라 다른 X 염색체 연관 질환들에 관한 잘못된 정보들을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X 염색체 유전자 돌연변이로 인한 유전 질환인 X 연관 질환에는 근육이 점점 약화되는 듀센 근이영양증(DMD), 특정 효소의 결핍으로 인해 다양한 장기 손상이 야기되는 파브리병(Fabry disease) 등도 포함된다.
이러한 질환을 가진 여성들이 의학 웹사이트에서 종종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보인자(carriers)’로 언급되고 있다. X 염색체 연관 유전 질환으로 고통받는 여성을 지원하는 비영리 단체인 [리멤버 더 걸스(Remember The Girls)]에 따르면, 여러 연구 결과 이러한 질환을 가진 여성들이 증상을 보일 수 있으며, 실제로 증상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이 단체는 유수의 의료 정보 허브의 오류 정보들을 긴급하게 수정하기 위해 최근 <희귀 질환 재조명(Rare Rewritten)> 캠페인을 시작했다.
대표적 의료 자원들, 즉 미 국립보건원(NIH)의 유전질환 데이터베이스(OMIM), 미 국립의학도서관(NLM)의 메드라인 플러스(MedlinePlus), NHS 영국 게놈 교육 프로그램, 미 국립암연구소(NCI), 펜실베니아 어린이 병원(CHOP) 등은 최신 연구 결과를 정확하게 반영하지 않고 있으며, 이로 인해 여성들의 증상에 대한 인지, 연구, 치료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쿄와기린(Kyowa Kirin), 암젠(Amgen), 사노피(Sanofi) 등 세 제약업체의 지원을 받은 이번 캠페인은 이 기관들에 연구 정보 업데이트를 요구하는 서한을 보내 X 염색체 연관 질환을 앓고 있는 여성들에 대한 정보를 최신 상태로 유지해 줄 것을 촉구한다.
서한은 의료자문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각 의료 웹사이트를 어떻게, 그리고 왜 적절하게 편집해야 하는지 설명한다.
또, ‘우성(dominant)’ 또는 ‘열성(recessive)’이라는 용어 대신 ‘X-연관’이라는 용어로 유전 양상을 설명하고, X-연관 유전을 설명할 때 ‘보인자’라는 용어 사용 중단, 여성의 증상 발생 가능성은 다양한 요인으로 인해 질환 및 개인마다 다르다는 점을 설명해 줄 것을 요청한다.
‘리멤버 더 걸스’의 설립자이자 부신백질이영양증(ALD)을 앓고 있는 테일러 케인(Taylor Kane)은 "의료 자원들이 여성의 X 연관 유전이나 X 연관 질환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책임 있게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인식 개선을 위해 관련 자료의 정확성 확보가 우선되어야 함을 분명히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