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피알 매거진

화폐는 ‘최상위 국가시스템’, 왜 가치와 신뢰 흔드나

교육ㆍ보건ㆍ치안 등 제도 중 화폐가 최상의 신뢰 체계

현금 살포에 국채 과다, 빚 의존 내년 728조 팽창 예산
‘인플레이션 세금’, 화폐의 타락과 ‘돈의 이민’ 유발

  • 기사입력 2025.09.11 10:22
  • 최종수정 2025.09.12 10:04
  • 기자명 허원순

더피알=허원순 | ‘이 지폐는 공적 사적 구별 없이 모든 채무에 대한 법정 통화다’(This note is legal tender for all debts, public and private.)

미국 달러에는 1달러부터 100달러까지 모든 지폐에 이렇게 쓰여 있다. 콜라 1병을 사면 동시에 지불 채무가 생기고 병원 치료를 받으면 진료비라는 채무가 생긴다. 학교에 가면 교육비 지급 채무가 발생하고, 정례적 공과금에다 국민으로서 세금 납부 채무도 생긴다. 이런 모든 공사(公私) 간 빚(거래)에 대해 법적 효력이 있는 통화라는 의미다.

여기에는 신뢰와 신용, 권위의 3요소가 작용한다. 기껏 종잇조각 하나일 뿐인 지폐는 어떻게 이런 지위를 확보했나. 법적으로 효력이 있기 때문이다. 법적 효력은 국가가 이행을 강제하고 보장한다는 의미다. 이때 국가는 특정 정권이나 특정 행정부 차원 이상의 국가를 의미함은 물론이다.

사진=위키백과
사진=위키백과

미국 달러 역시 처음부터 이렇게 신뢰 시스템으로 가동되지 않았다. 이 문구가 나타나기 전 미국 달러는 이론적으로 그만큼의 금과 은을 보관하고 있는 개별 은행들이 발행한 화폐였다. 종이로 만든 지폐라는 뜻의 은행권이라는 말은 그렇게 지금도 쓰인다.

미국의 남북 전쟁이 이런 화폐 관행을 바꿨다. 대규모 전쟁비용이 필요한 미국 정부는 금태환에서 벗어나는 지폐를 발행했는데, 사람들의 불신을 막기 위해 이 구절을 넣은 종이에 강제로 효력을 부여했다. 국가의 권위와 신뢰를 한껏 활용한 것이다. 그린백이라는 초기의 종이 지폐, 금은으로 바로 교환되지도 않는 달러에 대한 당시 미국인의 불신이 있었다.

하지만 국가가 법을 동원한 신뢰와 권위 시스템으로 유지하면서 종잇조각 달러는 미국 밖에서도 믿어 의심치 않는, 말 그대로 돈이다. 진짜 돈이다. 금으로 교환되지 않지만, 금보다 더 편리하고 더 신뢰할 수 있는 교환수단이자 저장 방편이 됐다.

전 세계 어디서도 그렇다. 과거 미소 냉전 시대 구소련에서도 달러의 힘은 세었다. 소비재가 궁핍한 구소련에서 가장 강력하고 무서운 수단, 많은 이들이 갖고 싶어 했던 게 미국 달러 그린백과 강한 맛의 빨간 말보로 담배였다는 사실은 유명한 일화다.

지금까지 연신 반미(反美)를 외치는 북한에서도 미국 달러의 힘은 세다. 경제가 엉망일수록, 나라 경제가 무너질수록 남의 나라 화폐 달러의 힘은 세어진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같은 보편적 현상이다.

한 나라의 화폐가 국내외에서 신뢰 신용 권위를 갖지 못하면 그 나라 통화는 배제 배척당하고 달러로 대체된다. 이를 달러라이제이션이라고 한다.

북한의 달러라이제이션 비율은 80%를 넘는다고 한다. 이쯤 되면 말끝마다 반미를 외치는 북한이지만 화폐통화로는 미국의 속국에 다름아니다. 미국 빼고 민간 보유의 달러가 가장 많은 나라로 아르헨티나가 꼽히는데, 아르헨티나의 근래 경제 상황과 함께 보면 왜 그런지, 그 사정은 다시 거론할 것도 못 된다.

한 마디로 국가가 구축한 다양한 사회 시스템 중에서 최상 최고의 신뢰 시스템이 화폐 제도라고 볼 수 있다.

국가는 치안 교육 보건 사법 우편 지방자치 등 다양한 시스템을 만들면서 성장하고 변신해 왔다. 이중 신뢰 차원에서 볼 때 최고의 시스템이 화폐인 것이다. 이는 근대를 개척한 대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의 말이다.

그래서 나라가 강하고 부유할수록 그 통화도 인정을 받고 신뢰를 받는다. 빈국, 분쟁국, 정정 불안 국가일수록 그런 국가 화폐는 외면 받는다. 실제 돈 가치도 없다.

5월 22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위변조대응센터에서 직원이 달러화와 원화를 정리하고 있다. 뉴시스
5월 22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위변조대응센터에서 직원이 달러화와 원화를 정리하고 있다. 뉴시스

그렇다면 한국 돈 원화는 국가 최상의 신뢰 시스템 화폐로서 굳건하다고 할 수 있는가. 한국 정부는 이따금 스스로가 최고 수준의 신뢰 시스템의 자국 화폐의 가치를 뒤흔든다. 무리한 통화증발을 통해서다.

국가는 두 가지 방법으로 세금을 걷는다고 한다. 하나는 종류도 다양한 보통의 일반 세금이다. 다른 하나는 인플레이션 유발을 통해서다. 통화량을 늘리는 것이다. 극단적으로는 발권력을 동원해 법적 강제를 담보하는 지폐를 찍어내는 것이고, 통상적으로는 정부가 빚을 내는(국채발행) 방식이다. 중앙은행을 동원하고, 시장에서 실제 자금을 흡수한다. 간접세든 직접세든 직접적 세금에 대한 이론과 담론은 넘치니 넘어가자.

더 큰 논쟁거리, 좀 더 주목할 것은 인플레이션의 유발 용인을 통한 우회적 세금 걷기다. 통화 남발을 통해 돈 가치 하락을 무릅쓰면서도 정부는 돈을 쓰고 싶어 하는 속성이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다. 기존 통화량을 희석해 정상적으로 ‘돈을 만드는’ 국민 개개인의 경제활동으로 이룬 부(돈)에 정부가 물타기로 끼어들어 기업과 개인의 부를 함께 써버린다고 해도 되겠다. 간접적이어서 국민 저항이 대체로 적다.

심해지면 김광균 시인의 시처럼 가을철 낙엽 같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가 된다. 아무 짝에 쓸모없는 존재다. 이런 통화증발은 권위적이거나 포퓰리즘 성향의 정권일수록 주저하지 않는다.

728조 내년도 예산안을 보면 정부가 인플레 과세의 길을 불사하고 있다. 국가 최상의 신뢰 시스템 화폐 제도를 정부가 흔드는 것이다.

불황에 전통적인 세금이 적게 걷히는 것은 모두 이해하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정부지출도 줄여야 한다. 나아가 공공 부문 전체의 허리띠 죄기, 긴축으로 가야 한다. 하지만 8%를 넘는 높은 수준의 슈퍼 팽창 예산을 짰다. 1년에 55조원(8.1%) 씩이나 나라 살림 규모를 늘린 적은 이전에 없었다.

국채를 발행해 이 돈을 조달하겠다는 것이 문제다. 정부가 내세운 내년도 국세 수입은 390조원 남짓이다. 경기 상황을 보면 이나마도 쉽지 않을 것이다. 결국, 나머지는 한국은행을 동원하는 대규모 국채발행에 기대겠다는 것이다.

기존의 국채(정부 빚) 이자 비용만 올해 한 해 동안 30.1조원에 달한다. 내년에 36.4조원, 2029년에는 한 해에 44조원이 될 전망이다. 이런 상환 이자가 무서워서도 오랫동안 저금리를 손대지 못한 일본처럼 될 것이다. 일본은 그래도 준기축 통화 국가이기도 하지만 한국의 원화는 국제 금융계에서 그런 지위도 없다.

이렇게 통화량을 대규모로 늘리면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신뢰 시스템인 화폐의 가치는 떨어지고 신뢰도 역시 하락할 수밖에 없다.

돈 가치를 지키는 게 중앙은행 차원을 넘어 정부와 국회의 주요한 책무일 텐데, 거꾸로 가겠다는 것일까. 그렇게 늘어난 재정지출의 쓰임새라도 타당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그 숱한 우려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 국민에게 일괄 현금을 살포하는 식은 곤란하다. 그런 현금 지급식 포퓰리즘 재정지출은 지양해야 한다.

이렇게 원화의 신뢰도를 떨어뜨려 버려선 안 된다. 한국의 생활 주권, 경제 주권인 원화의 가치를 낮춰버리고 믿음이 흔들리게 하면 ‘돈의 이민’이 빚어질 것이다. 한국인이 한국 돈을 외면하고, 달러 금 코인으로 저장과 관리 수단으로 바꿔 나갈 것이다.

서학 개미처럼 몸만 한국에 있고 돈과 자산은 실상 한국에 있지 않게 되면 원화는 악화일로로 빠질 수 있다. 신뢰성이 없는 길로 접어드는 악순환의 결과는 끔찍하다. 자칫 누구도 우리 돈으로 저축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 돈 원화가 신뢰를 잃으면 숱한 논란과 어려움 속에 겨우 찔끔 고친 연금개혁도 쓸모가 없게 된다. 미래 돈 가치를 믿을 수가 없는데, 국민연금을 조금 더 받은들 실제 생활이 뭐가 달라지겠는가.

신뢰 시스템으로 화폐가 국내외에서 믿음을 받느냐는 너무도 중요하다. 정부와 정치권이 화폐의 타락을 부추겨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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