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국PR학회는 지난 4일 오후 신년 특별세미나 ‘초불확실성 시대의 트렌드와 리질리언스: Bouncing Forward’를 개최했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박영숙 플레시먼힐러드 코리아 대표와 윤덕환 마크로밀 엠브레인 이사가 각각 ‘혼돈의 시대, 국가대표 없는 대한민국’, ‘2025 트렌드모니터’를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박영숙 대표는 글로벌 비즈니스 환경에서 불확실성이 커지는 가운데, 기업이 리질리언스(회복탄력성)를 기반으로 진화해나갈 지향점을 제시했다. 연성 규범의 붕괴와 함께 진행되는 ‘트럼프 2.0’ 시대의 비즈니스 환경을 5가지로 정리하고, 기업 커뮤니케이션 차원에서 이에 대응하기 위한 ‘교토삼굴’(狡免三窟, 영리한 토끼는 숨을 굴을 3개 파놓는다)의 지혜를 소개했다.
윤덕환 이사는 최근 서점가에서 주목받은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예를 들며 사회적 관계가 단절되고 감정 문해력이 낮아지는 ‘눈치 안 보는 사회’가 기업 커뮤니케이션에 미칠 영향을 설명했다. ‘초개인화의 만성화’ 속에서 PR이 더욱 어려워지면서, 기업은 각자의 세계에 갇힌 공중과 소통하기 위해 기존의 커뮤니케이션 양상을 벗어나야 할 필요가 더욱 커지고 있다.
더피알=김병주 기자 | 지난 2023년 10월 이후로 다수 출간된 쇼펜하우어 철학서는 얼마지 않아 한국 서점가의 주인공으로 올라섰다. 텍스트힙 열풍과 유명인들의 추천보다도 본질적인 쇼펜하우어 유행의 이유는 그가 말뿐인 위로를 건네지 않기 때문이다. ‘괜찮아, 다 잘 될 거야’라는 힐링의 메시지 대신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라는 냉정한 현실 인식에서 시작하는 그의 철학은 일견 염세적으로 여겨지지만, 그럼에도 욕망과 불만이 ‘잘 살려는 의지’에서 나온 것이라는 통찰로 현대인들에게 행복의 역설을 일깨워준다.

출판 트렌드 키워드를 살펴봐도 ‘주변 눈치 보지 말고’ ‘성찰하라’는 메시지가 대두되는 현상이 확인된다. 지난해 6월까지 교보문고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은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로, 철학 교양서 최초로 전 서점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했다. 그 뒤를 이은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모순’, ‘이처럼 사소한 것들’ 역시 눈치 보지 않는 성찰의 시간을 강조한다. ‘세이노의 가르침’을 필두로 한 자기계발서가 유행하던 전년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PR과 소통 측면의 문제가 발생한다. 듣는 사람에게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PR의 역할인데, ‘눈치 안 보는 사회’의 사람들은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다른 사람이 궁금하지 않지만, 여전히 자신을 이끄는 단서가 자기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혼란에 빠진다. 나를 평가하려는 타인의 시선에는 더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타인의 말을 경청하며 맥락, 상황, 뉘앙스를 읽는 ‘감정문해력’은 현저하게 떨어져있는 상태다.
윤덕환 마크로밀 엠브레인 이사는 타인에 대한 태도가 달라진 사회에서 공감의 실패와 끼리끼리 문화가 대두되는 현상을 지적하며, 현재 가장 강력한 트렌드를 ‘사회성 결핍’으로 꼽았다. 소비가 극단적으로 줄어들면서 인간관계 또한 축소되고, 외로움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쇼펜하우어가 각광받는다는 분석이다. 또 마케팅을 위한 타깃 세그멘테이션(고객 세분화)가 불가능해질 정도의 초개인화가 고착되는 상황에서 사회성과 감정문해력을 높일 ‘훈련’이 필요하다는 비판도 곁들였다.

“우천시가 어디죠?” 텍스트만 남고 콘텍스트는 증발
가정의 달인 5월과 한글날이 있는 10월이면 대중의 문해력 문제를 지적하는 뉴스가 집중적으로 쏟아지곤 한다. 매체사들은 ‘우천시 장소 변경’이라는 어린이집의 공지를 두고 “우천시가 어느 도시냐”고 되묻는 학부모, ‘심심한 사과’라는 단어를 ‘지루하고 재미 없는 사과’로 잘못 이해한 네티즌들을 비판하곤 한다. 심지어 이준석 당시 국민의힘 대표가 안철수 대선 후보를 만나 '무운을 빈다'는 표현을 건넨 것을 두고 한 방송사 기자가 '운이 없길 빈다'라는 뜻으로 잘못 보도하면서 기자들도 문해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이 지난해 8월 발표한 ‘제4차 성인문해능력조사’에 따르면 기본적인 읽기, 쓰기. 셈하기 등은 할 수 있으나 문해력이 낮아 이를 일상생활에 적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성인이 231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문해력 문제의 핵심은 맥락(context), 즉 상황 이해다. 특히 한국처럼 고맥락 문화권에서는 집단 내에서 분쟁을 피하기 위해 간접적이고 관계에 의존하는 의사소통방식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눈치 빠르게’ 맥락을 잘 파악하는 능력이 요구됐다. 소위 ‘잘 듣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문제는 눈치가 떨어지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은데다, 그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윤 이사는 “드라마나 미디어에서는 눈치 보지 않고 자기감정에 충실한 인물들을 선호하지만, 상황 고려 없이 자기 기분을 드러내는 사람을 내 주변 사람으로 두기는 굉장히 싫어하는 모순이 발생하고 있다”며 “이렇게 되면 인간관계 확장에 부담을 느끼기 때문에 사람을 만나는 상황을 피하는 트렌드가 형성된다”고 말했다.
섞이지 않는 두 세상, 양극화의 내재화 “너는 재벌집 막내아들이 아니야”
‘소매판매 절벽’은 현실이 됐다. 통계청 국가통계포털(KOSIS)에 따르면 작년 1∼11월 소매판매액 지수는 전년 같은 기간보다 2.1% 감소하며 21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품목에도 예외가 없어서, 자동차·가전 등 내구재와 의복 등 준내구재, 음식료품 등 비내구재를 포함해 모든 상품군 소비가 1995년 관련 통계 집계 이후 최초로 2년 연속 감소했다.
그 결과 소비 시장에서는 2가지 상반된 행보가 관측된다. 가용 자원 감소로 인한 작은 소비와, 사치재 시장 활성화로 대표되는 명품 대전이다. 지난 추석에는 7억원대 프랑스 와인세트와 3만원짜리 스팸 세트 모두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우리나라만 그런 것도 아니라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자회사인 메리엄-웹스터는 2024년 올해의 단어로 양극화(Polarization)을 선정했다.
상반된 소비 생활을 하는 두 집단은 문화적으로 어울리지 않는다. 계급이 고착화되는 것이다. 놀랍게도 2030세대는 계급을 거부하는 대신 이를 ‘밈’으로 소비하는 모습을 보인다.
윤 이사는 “‘사랑과 야망’ 식의 노력으로 계층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드라마는 지고 ‘재벌집 막내아들’과 같이 회귀, 빙의, 환생 등을 통해 태어날 때부터 모든 능력을 가진 주인공을 다룬 드라마가 흥행하고 있다”며 “기본적으로 타고난 부자에 대한 선망이 압도적으로 강해졌다는 의미인데, 2030세대가 계급을 받아들이고 재생산하는 과정에서 교실 문화도 바뀌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학기 중 여행 등 체험학습을 가지 않는 학생들을 비하하는 ‘개근거지’라는 표현이 나오고, 남자 아이돌 그룹 제로베이스원의 멤버 장하오의 포토카드가 중고거래 플랫폼에서 190만원에 팔리며 ‘반포자이’ 포토카드로 불렸던 것은 계급의 고착화와 더불어 대면소통상황의 낮은 감정문해력이 야기한 문제를 보여준다.

‘유령의 타인이 감시한다’ 바꿀 수 있는 건 내 생각뿐
타인에 대한 관심은 떨어졌지만 주변의 감정을 살피고 눈치를 봐야하는 상황이 그대로인 경우, 개인의 내면에서는 이상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 간에 간극이 발생한다. 스스로 원하는 나의 모습과 타인이 바라보는 나의 모습 간의 차이가 일상화되면 불안과 우울 같은 부정적 정서가 만성화된다.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려 해도 인정받지 못할 것이 두려워 개개인의 행동, 사회에 대한 생각 또한 보수화된다.
자신에 대한 단서를 타인으로부터의 평가에서 찾는 이러한 현상은 사회생활에서의 경쟁력을 바라보는 관점에서도 드러난다. 마크로밀 엠브레인이 2014년부터 ‘사회생활에서 타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쟁력’ 지표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기존에는 개개인이 자신의 성격을 바꿔 경쟁력으로 삼으려는 경향이 있었지만, 이제는 단순히 경제력이 곧 경쟁력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가장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런 판단이 실제 인간관계에 근거한 것은 아님에도, 돈은 개인을 평가하는 최고의 지표로 올라섰다. 윤 이사는 “10년 전만 해도 전문성 있는 지식이 성공의 돌파구가 된다고 생각해 새벽 학원이나 직장인 직무 교육을 통해 인정받으려는 사람들이 많았다”며 “당시 연말연초 도서 키워드 최상단에 올랐던 ‘조직생활에서 성공하는 법’은 이제 30위권 내에 들지도 못한다. 지금의 경제·경영서 핵심 키워드는 오로지 ‘자산 축적’”라고 부연했다.
개개인이 연대를 통해 사회를 바꿔보려는 생각마저 버린 데서 나온 것이 지난해 인터넷을 휩쓴 ‘원영적 사고’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 궁극적으론 긍정적인 결과로 귀결될 것이라는 확고한 낙관주의가 유행한 이유는,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자신의 생각밖에 없다는 데 기인한다. ‘하면 된다’가 아니라 ‘이거면 된다’의 메시지가 개인을 설득하는 시대인 것이다.
‘모욕이 놀이가 되다’ 소중해진 내 공간, 내 자리
낮은 감정문해력으로 인한 공감 실패는 사회 여기저기서 드러나고 있다. 좁게는 정서 발달 저하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게임 룰을 아이들이 숙지할 수 없게 된 초등학교 교실부터, 넓게는 지난해 7월 서울 시청역 교차로 차량 돌진 사고, 12월 무안에서 일어난 제주항공 2216편 활주로 이탈 사고, 지난 1월 서울서부지방법원 습격까지 공통적으로 일어난 선을 넘는 조롱과 모욕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타인에 대한 가해를 단순한 장난이나 재미로 치부하며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현상은 앞으로도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윤 이사의 설명이다. 또한 경험과 지식수준, 경제적 상황이라는 공통분모로 계급이 재편되면서 ‘끼리끼리’ 문화는 더 확산할 것이라는 점도 덧붙였다.

AI의 급격한 기술발달은 감정문해력 문제를 더 확대시킬 수 있다. 윤 이사는 “AI는 기본적으로 거부를 잘 하지 않고 사용자에 맞춰서 답변을 수정해준다는 점에서 실제 인간과의 상호작용에 대한 적응력을 길러주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소통에 불편함을 느껴 발생하는 트렌드 중 하나는 자신이 혼자 머물 공간을 찾는 경향이다. 윤 이사는 “특히 2030세대 사이에서 이러한 니즈가 큰데, 일본에서 1980년대 후반 인플레이션이 격화되면서 집을 살 돈이 없는 2030세대가 차를 사서 자기 공간을 꾸미는 마이카 붐을 참고해볼 수 있다”고 부연했다.
리더십과 조직 형태의 변화도 예상된다. 2023년까지가 대퇴사 시대였다면, 이제는 대잔류의 시대라는 설명이다. 윤 이사는 “현재 직장인 10명 중 7~8명은 퇴사와 잔류 사이에서 잔류를 선택한다”며 “조직 내에서 한정된 자리를 놓고 인정 투쟁이 격화할 가능성이 있는데, 흥미롭게도 급격한 리더십 변화를 일으키는 인적 구조 개편이 벌어져도 이를 받아들이는 경향이 더 커졌다”고 말했다.
국민 MC, 유재석이 마지막…SNS에 사회성 빼앗기지 말길
소비자들이 가진 결핍은 유행을 추론할 수 있게 하는 가장 큰 단서다. 어떠한 현상이 일시적인지, 지속적인 트렌드로 유지되는지, 혹은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을지는 지나고 나서야 명확히 보이는 법이다. 트렌드 연구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소비자들의 태도를 통해서 현상을 추정할 뿐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트렌드를 찾기 어려워졌지만, 트렌드가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다. 윤 이사는 다양한 트렌드 서적의 내용을 토대로 ‘일상의 여가화’와 ‘조용한 사람들’이라는 키워드를 조명했다.
일상의 여가화는 개인이 특정 목표를 중시하는 대신 자신의 일상을 여가라고 스스로 정의하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 장을 보러 나왔다가 흥미로운 시설이나 물건이 있으면 그 순간 나만의 여행이 시작된다고 여기는 식이다.
조용한 사람들은 노이즈 캔슬링과 텍스트 힙 현상과 관련이 있다. 사람들은 각자의 세상에 몰입하기 위해 외부 소음을 차단하고, 텍스트가 제공하는 세계에 집중한다.
다만 기존의 마케팅 수단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가능성은 높아졌다. 외부적인 메가트렌드가 발생하기 어려워진 현재, 팬덤이 국소화되는 현상이 그 예다.
윤 이사는 “가수 임영웅은 5060세대에 엄청난 팬덤을 가졌지만, 10대들 사이에서 인지도는 5%에 불과했고 호감도도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며 “평균적인 국민을 페르소나로 놓고 타깃을 설정하는 식의 시장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고 말했다.
윤 이사는 비록 SNS의 영향이 막강하지만, 본질적인 욕구 충족을 해줄 수 있는 대상은 아니라는 점도 강조했다. 많은 사회과학자들은 인간관계에 대한 결핍을 인터넷 소통으로 충족시키기 어렵다고 말한다. SNS가 사회성을 박탈한다는 우려에 영미권에서는 청소년의 SNS 사용 규제 법안 발의가 잇따르고 있다.
윤 이사는 “SNS는 청소년들이 사회에서 겪을 거부와 어려움, 이에 대한 대응 능력을 훈련할 가능성을 스스로 박탈하게 만든다”며 “제재까지는 아니더라도, SNS사 사회성 훈련을 가로막지 않을 수 있도록 정책적인 방향 전환을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