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피알=김병주 기자 | 표준국어대사전은 ‘어른’이라는 단어를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라 정의하고 있다. 올해 84세인 이중근 부영그룹 회장의 명함에는 ‘어른다운 노인’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이 회장은 지역사회·저출산·고령화 등 한국 사회가 직면한 문제마다 파격적인 정면 돌파로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노인으로 멈춰선 채 누릴 권리를 주장하는 대신 경험과 연륜을 활용해 직접 사회적 의제를 선도하고 있는 그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엿볼 수 있는 지점이다.

이 회장이 일관적으로 보이는 행보가 바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다. 기업과 기업가들이 온전히 ‘자신의 몫을 다해야 한다’는 부영그룹의 경영철학을 통해서도 기업의 목표와 책임이 성장보다는 존재 자체라는 생각을 밝히고 있다.
이 회장은 수십 년 동안 ‘세발자전거론’이라는 경영철학으로 부영그룹을 이끌고 있다. 좋은 기업은 세발자전거와 마찬가지로 “두발자전거보다 느리고 투박하지만, 넘어지지 않고 목적지까지 안정적으로 갈 수 있다”는 의미다. 그간 부영그룹의 사업영역인 부동산, 금융, 건설 세 축이 자전거의 각 발이 되었다면, 오늘날 부영그룹은 지역사회, 출산, 고령화 문제에 중점적으로 대응하며 국가를 지탱할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
연일 뉴스에 오르내리는 그의 행보는 시대가 그를 쫓아왔다는 증거로 볼 수도 있다. 고향인 전남 순천 일대에 기부를 이어가고, 그룹 차원의 출산 장려금 지급을 통해 정부 정책뿐 아니라 기업이 출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롤모델을 제시했다. 여기에 대한노인회장으로서 변화하는 노인의 역할과 개념에 부합하는 제안으로 고령층의 경제적·사회적 가치를 일깨우고 있다.

‘수구초심’ 고향 순천 지키는 사람들에게 기부로 화답
이 회장은 부영그룹이 탄탄해지기 이전부터 기부에 적극 나섰다. 지난 1992년 순천에서 조성한 아파트 단지 가까이에 교육청에서 땅을 받아 부영초등학교를 지어준 것이 시작이었다. 학교와 맞닿은 아파트도 잘 팔리고, 시청과 교육청과의 관계도 좋아졌다. 무엇보다 그의 말대로 “기부를 하다 보니 그 기쁨이 정말 커지는 것은 분명했다”는 점이 중요했다.
지난 2023년 5월 말부터 6월 초순까지는 사비로 고향인 순천시 서면 운평리 6개 마을 280여가구 주민들에게 약 1억원씩을 개인통장으로 입금했다. 세금을 공제하고 2600만원에서부터 최대 9020만원까지 거주 연수에 따라 5단계로 차등 지급했다.
기부 대상을 고향으로 특정한 것은 지방 소멸에 대한 문제의식 때문이라는 평이다. 본인이 농촌 출신으로 영농 빚을 진 사람에게 도움이 절실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회장은 기부에 앞서 고향 마을이 소속된 운평리 마을 이장 6명을 서울로 초대해 "대대손손 마을을 지켜온 고향 주민들에게 의미 있는 선물을 하고 싶다"는 말을 하고 이틀 뒤 현금을 입금한 것으로 전해졌다.
부영그룹은 이와 별도로 서면 자연 마을 2900여 가구에는 참치세트와 공구세트를 추가로 전달하고, 서면 지역 전 가구와 순천 부영아파트 입주자 5000여 가구에도 참치세트를 지급했다.
같은 해 9월에는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고향사랑기부금으로 연간 개인 최대 금액이었던 500만원을 순천, 광양, 여수 등 3곳에 기부했다. 당시 이 회장은 동년 시작된 고향사랑기부제를 언급하며 "순천과 광양, 여수는 한 지역이다. 고향사랑기부제의 성공적인 안착과 기부 문화 확산을 위해 참여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고향 이웃은 물론 초·중·고 동창, 군 동기·선후배 등에게도 1억원씩 준 것으로도 화제를 모았다. 약 1300여명에게 현금으로는 1650억원, 선물세트와 공구세트, 역사책 등 물품까지 합치면 개인 사재로만 2650억원을 기부했다. 사비로 한 일이라 부영그룹 임직원들도 모르고 있다가 언론 보도로 뒤늦게 알았다고 한다.
이 회장은 이후 한 언론사 인터뷰에서 “돈을 많이 벌어도 마지막엔 내가 다 못 가져간다는 것을 살면서 배웠다. 그렇다면 더불어 사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외에도 카이스트 기숙사 리모델링 비용 200억원, 외국인 유학생 83명에게 장학금 3억4000만원, EBS 사회공헌 프로그램 '나눔 0700’에 10억 원, 대한적십자사에 3억원 등 기부 선행을 줄기차게 이어오고 있다.
부영그룹 차원에서도 캄보디아·라오스·베트남 등에 학교를 설립하고, 버스를 기증하는 등 사회공헌 규모가 지난해까지 1조2000억원에 이른다.

‘아이들의 가치’ 출산장려금, 제도 변화 선순환으로 이어져
‘직원 자녀 1명당 1억 원’이라는 부영그룹의 출산장려금 제도는 사내 출생률을 20% 이상 끌어올리는 실질적인 성과를 거뒀다. 여기에 기업 출산지원금과 관련한 세법 개정과 타 기업의 참여를 이끄는 나비효과도 불러일으켰다.
이 회장은 출산장려금 제도와 관련해 “쓸 데는 많은데 찔끔찔끔 주는 것보다 부모에게 한 번에 줘서 알아서 쓰도록 하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나 생각한다”며 “직접 받아야 당사자도 출산에 대한 가치가 크다는 점을 바로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설명한 바 있다.
부영그룹은 지난 5일 오전 서울 중구 부영태평빌딩에서 시무식을 열고 지난해 출산한 직원 자녀 1인당 1억원씩 총 28억원의 출산장려금을 지원했다. 이날 시무식에는 지난해 태어난 임직원 자녀 14명이 참석하면서, 이 회장이 신년사를 발표하는 동안 아기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제도 시행 첫해인 지난해에는 2021년~2023년분을 소급해 직원 66명에게 총 70억원을 후원했다. 2021년부터 2023년까지 연평균 23명의 직원 자녀가 태어난 것을 고려하면 1년 만에 사내 출생률이 20% 이상 올랐다. 처음 장려금을 받은 후 지난해 둘째를 출산해 이번까지 모두 2억원을 받은 직원도 3명이 나왔다. 현재까지의 장려금 지급액은 98억원이다.
2021년에 이어 지난해 둘째 출산으로 누적 2억원의 지원금을 받게 된 한 직원은 “회사 지원이 확실히 동기 부여가 된다”며 “사내에 출산하려는 직원도 늘고, 임산부도 증가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제도 시행 후 "직원들로부터 '출산지원금 덕에 출산을 결심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편지나 메모로 감사를 전하는 직원들도 많다"고 말했다.
이날 기자 간담회에서 이 회장은 "대한민국의 저출생 문제가 지속된다면 20년 후 경제생산인구수 감소, 국방 인력 절대 부족 등 국가 존립의 위기를 겪게 될 것으로 보고 해결책으로 출산장려금 지급을 결정했다"면서 "출생률을 끌어올릴 목적으로 시행했고 효과가 있을 것으로 확실히 기대한다. 국가적으로 인구 비율이 '이만하면 됐다'고 할 때까지는 장려금 지급을 계속하겠다”고 덧붙였다.
정책 변화도 뒤따랐다. 지난해 2월 부영그룹이 출산장려금 기부면세 제도를 제안하면서 기획재정부가 이를 받아들였고, 출산지원금 비과세 세법 개정안이 의결되면서 올해 1월부터 기업이 지급한 출산지원금은 전액 비과세 혜택을 적용하게 됐다. 따라서 2024년 연말정산부터 자녀 출생일 2년 이내에 받는 출산지원금은 최대 2회까지 전액 비과세 적용된다. 정부와 국회가 세제 개편으로 화답하자 여러 기업이 연달아 출산·양육 지원책을 강화하기도 했다.
청년층 사이에서도 이러한 지원정책이 소문나면서 20~30대 입사 지원자가 증가하는 효과도 거뒀다. 지난해 6월 7년 만에 열린 부영그룹 공개 채용에서는 지원자 수가 7년 전보다 5배 이상 늘었는데, 경력사원 지원자 중 20~30대가 3배 이상 증가했다.

‘노인을 노인답게’ 연령 상향이 불러올 일하는 사회
이중근 회장은 고령화 문제에도 적극 나서며 노인 연령 상향을 정부에 공식 제안했다. 지난해 12월 초고령 사회(65세 이상이 전체 인구의 20% 이상)에 진입한 대한민국은 이 추세대로라면 2050년 전체 인구의 40%인 2000만명 정도가 노인인구로 분류된다. 자손들에게 노인 부양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우는 대신, 노인 인구를 줄여 생산인구를 늘리면서 정부의 사회적 비용 부담을 줄이자는 취지다.
노인 연령 상향은 이 회장이 대한노인회장 선거 당시 공약으로 내건 사항이기도 하다. 이 회장은 지난해 10월 제19대 대한노인회장으로 취임하면서 1981년 노인복지법 제정 이래 44년간 유지되던 법정 노인 연령 65세를 연간 1세씩 75세까지 단계적으로 끌어올리자고 이야기를 꺼냈다.
이 회장은 고령화 문제에 대해 “먼 산 위의 작은 눈덩이”로 비유하며 “우리 눈앞까지 굴러왔을 땐 감당 못 할 정도로 커져 있을 것”이라고 사태의 시급함을 일깨웠다.
일각에서는 연금 수급 시기가 늦어지고, 기성세대의 혜택이 연장되며 젊은 층과의 세대 갈등을 우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의학의 발달로 70대 이상도 건강해진 지금 “일거리가 있으면 충분히 일할 수 있다”는 데 더해 “산술적으로 노인 수가 적어지고, 노인 연령이 순차적으로 오르는 것이기 때문에 젊은 사람의 일자리를 뺏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기업과 정부의 분담을 통한 임금피크제 확대 적용도 언급했다. 이 회장은 “가령 65세 때의 임금을 정점으로 66세는 40%로 떨어뜨린 뒤 연 2%씩 하향시키면 나중에는 20%를 받게 된다”며 “월 500만원 받던 사람이 75세에는 월 100만원을 받는다는 의미인데 작은 돈이 아니다. 회사와 정부가 일정액씩 분담하는 식으로 비용을 부담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정부도 화답했다. 보건복지부는 최근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에게 신년 업무 추진계획을 보고하며 ‘노인 연령 상향 논의를 본격화하겠다’고 밝혔다. 이기일 복지부 1차관은 브리핑에서 “지난해 이중근 대한노인회장이 노인 연령 상향을 제안했는데 매우 감사한 일”이라고 말했다.
여론도 우호적인 편이다. 지난달 17일 이숙자 서울시의회 의원(운영위원장)은 50세 이상 서울시민 중 74%가 노인 연령 상향에 찬성한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지난해 12월 3~6일 나흘간 50세 이상 서울시민 6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여론조사에서, 노인 연령 적정 기준에 대해서는 ‘70세 이상’이 59%로 가장 많았다.
이 회장은 “헌법의 기본권, 자유 보장 등은 (생산 인구와 같은) 사회적 구성요건이 성립하지 않으면 허구에 불과하다. 노인이 노인답게 복지 혜택을 누리거나 대우받으려면 노인 숫자 자체도 규모를 줄여서 희소성이 있어야 한다”며 “노인도 권리만 주장하지 말고 좀 어른스러워져야 한다”고 의견을 피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