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국PR학회는 지난 4일 오후 신년 특별세미나 ‘초불확실성 시대의 트렌드와 리질리언스: Bouncing Forward’를 개최했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박영숙 플레시먼힐러드 코리아 대표와 윤덕환 마크로밀 엠브레인 이사가 각각 ‘혼돈의 시대, 국가대표 없는 대한민국’, ‘2025 트렌드모니터’를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박영숙 대표는 글로벌 비즈니스 환경에서 불확실성이 커지는 가운데, 기업이 리질리언스(회복탄력성)를 기반으로 진화해나갈 지향점을 제시했다. 연성 규범의 붕괴와 함께 진행되는 ‘트럼프 2.0’ 시대의 비즈니스 환경을 5가지로 정리하고, 기업 커뮤니케이션 차원에서 이에 대응하기 위한 ‘교토삼굴’(狡免三窟, 영리한 토끼는 숨을 굴을 3개 파놓는다)의 지혜를 소개했다.
윤덕환 이사는 최근 서점가에서 주목받은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예를 들며 사회적 관계가 단절되고 감정 문해력이 낮아지는 ‘눈치 안 보는 사회’가 기업 커뮤니케이션에 미칠 영향을 설명했다. ‘초개인화의 만성화’ 속에서 PR이 더욱 어려워지면서, 기업은 각자의 세계에 갇힌 공중과 소통하기 위해 기존의 커뮤니케이션 양상을 벗어나야 할 필요가 더욱 커지고 있다.
더피알=김병주 기자 | 어느 때보다도 소통이 어렵고, 그만큼 절실한 시대다. 지난 2024년 연말, 전 세계 기업들은 트럼프 2기 행정부에 대한 대비가 한창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미-중 패권전쟁과 자국 우선주의가 한창 대두되던 지난 12월 3일 예기치 못한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과 그 후폭풍으로 관제탑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국가대항전에 국가대표가 없는 상황에서, 올 한해 기업과 개인, 우리 사회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박영숙 플레시먼힐러드 코리아 대표는 조심스럽게 ‘나아갈 수 있다’는 대답을 내놓는다.
글로벌 기업의 전쟁터에서는 복합적 글로벌 리스크를 기업과 정부가 통합적으로 관리하고, 사안마다 즉각적인 대응을 가능케 해줄 수많은 시나리오와 함께 ‘다정함’으로 우군을 만들어둬야 한다. 박 대표는 우리 기업이 글로벌 환경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지점을 5가지로 정리하고, 기업이 진화(Bounce forward)할 수 있게 하는 PA(Public Affair) 차원의 인사이트를 나눴다.

AI의 진화, 자본주의·민주주의·법치주의의 변곡점
전문가들은 중국의 부상, 유럽의 난민 유입,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 코로나19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거치며 100년에 한 번 겪을 역사적 변곡점을 지나고 있다고 말한다. 지경학(geo-economics)적·정치적 격변으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법치주의의 연성 규범은 붕괴되는 지경에 이르렀고, 스트롱맨 리더들은 이 현상을 가속화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당일 파리기후변화협정을 탈퇴한 데 이어 멕시코·캐나다에 관세를 부과하는 행보에서 보듯이, 국제사회에서는 상대를 인정하고 대화하기보단 공격하고 무시하는 행태가 오히려 정치적으로 더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만연해졌다. 윤리 경영이나 지속가능성을 중시해온 기업들의 행보가 무색하게도, 자본주의 자체도 다른 이해관계자들을 배제한 채 단기적인 주주 가치 제고에 몰두해있다는 평이다. 법원의 법 집행 일관성과 사법절차의 정당성이 의심받은 지는 오래다.
사회 전반의 신뢰 상실로 사회적 비용이 증가하면서, 사회 전반의 운영 시스템과 가치 기준을 재조정(Recalibration)할 필요는 더욱 커졌다.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도 경제적 양극화와 2030세대 내의 소득 격차 문제가 지적됐지만, 미국 정치권에서 이를 충분히 대응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모펀드계의 거물 웨이지안 샨(Weijian Shan) PAG캐피털 회장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미중갈등은 궁극적으론 중국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중국은 수출 중심 경제에서 소비 지출에 초점을 둔 경제로 개혁을 해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그 말대로, 지난 2010년 이후 세계 2위의 경제규모(GDP)로 올라선 중국은 미국을 매섭게 위협 중이다.
불평등한 부, 다보스의 질문 ‘지능시대의 협력은 가능한가?’
코로나19 기간 주요 국가의 부채규모가 증가하면서 전 세계 부채 규모는 지난해 1분기 약 323조달러(45경7000조원)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세계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비율은 326%에 이른다. 무역 긴장 고조와 공급망 붕괴 속에서 세계적으로 재정 부담 악화 위험이 증가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지난 1월 20일 열린 제55회 다보스포럼에서는 ‘지능시대의 협력’을 주제로 글로벌 리스크들의 클러스터화에 대응하기 위한 기업과 정부의 통합 리스크 관리 구축에 대한 의견이 개진됐다. 국가간 무력 충돌, 허위정보 확산, 극단적 기상 이벤트 등이 주요 단기 리스크로 꼽히면서, 장기적으론 전략 분석 프레임에 인구, 기후, 기술변화, 지정학적 요소를 활용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금융전문가들과 기업 전략가들이 공통적으로 꼽은 리스크는 ‘부의 불평등’과 ‘사회적 분열’이었다. AI가 경제 성장을 이끌 것이 자명해지면서 AI 생태계의 핵심 기술 선점이 중요해지고 있지만, 다보스 현장에서는 AI 기술로 양산한 허위정보가 일으키는 수많은 사회 문제를 두고, 과연 인간이 AI를 신뢰하고 협력할 수 있는 환경인지 의구심을 갖는 목소리도 높았다.

금융자본주의 시대의 한국, 구조적 특수성에 발목 잡히나
한국도 가계 부채·개인사업자 부채 증가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지난해에는 수출 8.1% 성장이라는 역대급 성과를 거두고 한류 확산과 무역 브랜드 파워의 질적 개선 등을 이뤄냈지만, 철강 분야 등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폭탄’이 현실화되면서 올해는 수출액이 10%까지도 감소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중요한 점은 이미 한국에서는 금융자본이 산업자본을 컨트롤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내에 사모펀드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지 20년이 지난 현재 사모펀드는 국내 인수합병(M&A)시장의 절반을 소화하며 자본시장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사모펀드 업계가 운용하는 자본 규모도 140~150조원 수준이다.
개인투자자만 해도 1500만여명을 넘고 펀드 수익모델이 다변화되고 있지만, 한국 자본시장은 단순히 상법 개정 정도로 빠르게 체질개선을 하기 힘든 구조적 특성이 있다. 상장은 쉽지만 퇴출은 어렵고, 상속·증여세 부담이 심하며, 반기업가 정서가 강한데다, 가족경영 기업에 패밀리 거버넌스는 부재한 한국의 특수한 환경이 새로운 비즈니스를 성장시키기에 좋은 환경인지는 다시 짚어보아야 한다.
따라서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기업 가치 향상 노력이 중요한 시점이다. 이사회 중심의 거버넌스 개선과 다양한 주주들과의 소통도 갈등을 줄여줄 수 있다.
복합적 글로벌 리스크, 전력이 국력이다
개별 기업으로서는 리스크 히트맵 등을 통해 복합적 글로벌 리스크를 한 눈에 보는 훈련도 중요하다. 반도체·배터리 종속 심화라는 리스크 앞에서 국내 정치 환경에 따른 비생산적 이념 갈등에 노출될 필요는 없다.
AI 시장의 확대에는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필수다. 이미 세계 AI가 쓰는 전력량은 소규모 국가의 1년 전력 사용량에 맞먹는 수준이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지난 2022년 기준 전 세계에서 6번째로 전기를 많이 쓰는 나라로 꼽혔는데,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량 증가가 예정된 상황에서 에너지 안보는 이념적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
지난 21일 한국전력공사 경영연구원의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올해 전력수요량은 549.4TWh로 전년 대비 1.9% 증가할 전망이다. 이는 AI 분야 투자 확대 및 데이터센터 급증세에 기인하는데, 데이터센터 1개소의 연간 평균 전력사용량은 25GWh로 4인 가구 6000세대가 연간 사용하는 수준의 전력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대체 불가 영역 파악과 옵션 가치를 만드는 파트너십
여건이 어려울수록 기업은 미래에 발생할 위기상황에 대처할 비상 계획을 여러 개 마련해놓아야 한다. 개인은 물론 기업 또한 대체불가의 영역을 구축하고, 향후 옵션 가치를 만들어가기 위한 진정성 있는 파트너십을 구축해야 할 것이다.
시장 차원에서 관계 자산을 다양하게 구축해놓을 필요도 있다. 박 대표는 “기존에 의존도가 높은 미국·중국 외에도 일본과 유럽 시장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며 “일본과 유럽은 한국에도 관심이 많고, 역사적으로 갈등 조정의 경험이 풍부한 국가들이기 때문에 협업 과정에서 새로운 협상 인사이트나 우리에게 없는 소프트파워를 얻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다정함, 소통, 협력’을 갖춘 기업 외교관이 되어라
윈윈할 수 있는 협상력의 중요성은 글로벌 기업의 전쟁터가 된 PA 영역에서 빛을 발한다. PA의 관건은 현지 정부, 의회, 규제기관, 커뮤니티 등 여러 이해관계자들이 기업 관련 이슈를 정확하게 인지하도록 돕고, 여론과 정책환경을 소프트 파워를 활용해 개선해나가는 작업이다. 일단 세게 던지고 필요한 부분을 쟁취하는 트럼프식 협상 테이블에서는 즉각적이고 기민한 대응이 완벽하게 이뤄져야 한다.
PR 커뮤니케이터들로서는 주요 어젠다를 매일 모니터링하면서 ‘실수하지 않는’ 기업 커뮤니케이션 가이드를 정리해 공유할 필요가 커졌다. 또 지경학적 복잡성과 AI 기술 진화로 인한 미스/디스인포메이션으로 기업의 평판은 늘 타격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고위급 임원들은 물론 전사적인 차원에서도 지금 어떤 상황에서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할지 알리는 역할이 중요하다.
박 대표는 “커뮤니케이터들은 기업 외교관이 되어야한다”며 “이해관계자 입장에서 목표, 가치, 기대 효과 이해하고 기업 입장과의 간극을 중재하는 외교관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중요한 순간에는 우리 편을 들어줄 친구가 많이 필요한데, 우리 대기업들이 국내에서는 친구가 많을지 몰라도 글로벌 시장에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한국 시장에서 PA의 역할은 타 지역과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너서클’에 들어가는 것을 중시하는 미국, 사안 하나하나에 딥다이브하는 전문성을 중시하는 EU와 달리, 로비 활동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아시아권에서는 가장 중요한 이해관계자를 선별해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박 대표는 “이해관계자 맵핑, 다이나믹스 이해와 더불어 서드 파티(제3자)의견을 수렴하는 것도 중요하다”며 “아시아에서는 액션 중심 싱크탱크들이 효과적일 수 있어서, 지금보다 더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긴 보고서보다는 이미지 1장, 보고서 1장을 더 선호하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예시처럼, 의사결정자들의 언어가 달라짐에 따라 메시징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기업들에게 최적의 시나리오를 구축해놓고 급박한 상황에서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아군을 많이 만들어놓기를 원한다. PA 임원들에게는 필요할 때마다 ‘오분대기조’처럼 출동해 대화의 장을 어레인지해줄 사람이 소중하다. “결국 솔루션을 주는 것은 액션이고, 액션 컨설팅이야말로 AI를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이 박 대표의 견해다.
박 대표는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말을 인용하며 기업과 개인이 함께 성장하기 위한 다정함, 소통, 협력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특히 커뮤니케이터들에게는 협의의, 편협한 다정함이 아니라 그 반경을 넓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공감으로 확장된 소통이 필요하다는 점을 덧붙였다. 커뮤니케이션 업계의 특성상 개개인이 진일보하지 못하면 기업은 주저앉기 때문에, 리더들은 늘 자신이 진정한 공감을 이루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는 주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