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피알=김병주 기자 | 중국의 인공지능(AI) 스타트업 딥시크(DeepSeek)가 내놓은 추론 AI 모델 ‘딥시크 R1’으로 세계가 충격에 빠졌다. 챗GPT의 5%밖에 되지 않는 개발 비용으로 그에 맞먹는 성능을 내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호기심을 가진 이용자가 폭주하기도 했으나, AI 수혜를 입어온 반도체·전력기기 업체 주가가 급락했다.
세계 각국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딥시크 등장으로 미 증시에서 비중이 큰 빅테크 기업들의 주가가 폭락한 가운데, 각국 기업과 정부 기관들은 중국 정부로의 잠재적 데이터 유출 가능성과 개인정보 보호 취약성을 우려해 딥시크 차단에 나서고 있다.
일각에서는 미국이 아닌 다른 국가도 적은 돈으로 강력한 AI 모델을 구축할 수 있다는 점이 증명되면서 이를 AI 대중화의 도화선이라 보는 시선도 있다.

딥시크는 지난 1월 20일 ‘R1’을 출시했다. R1은 애플 앱스토어 무료 앱 순위에서 챗GPT를 밀어내고 1위에 올랐으며, 국내에서도 31일 기준 애플 앱스토어 무료 앱 순위 1위를 기록했다.
R1은 오픈AI의 'o1'과 비교해 미국 수학경시대회 벤치마크 테스트에서 97.3%의 정확도를 기록하며 96.4%를 기록한 o1을 앞섰다. R1의 연산 비용은 토큰(텍스트 최소 단위) 100만 개당 2.19달러로 o1(60달러) 대비 30분의 1 수준이다.
지난달 딥시크가 공개한 AI 모델 ‘딥시크-V3’은 개발 비용이 557만6000달러(약 81억원)에 불과한데, 이는 엔비디아의 GPU를 활용한 오픈AI가 최신 챗GPT 개발에 투자한 비용인 1억 달러(약 1455억원)의 5.6%에 해당한다.
R1은 미국의 대중 제재 탓에 엔비디아의 최첨단 AI 가속기 H100 대신 성능이 떨어지는 H800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딥시크의 연구 인력은 139명으로 오픈AI(1200명)의 9분의 1 수준이다.
현재 R1은 오픈소스로 공개됐지만 학습 데이터와 일부 알고리즘은 공개되지 않았다.

美 기업·정부 경계…반도체·기술 유출 조사 착수
‘가성비’ AI의 등장에 미국 빅테크 기업들이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 딥시크가 엔비디아 고사양 AI 반도체를 다수 활용하지 않아도 경쟁력 있는 기술을 구현할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기존 AI 기업들의 주가폭락으로 이어진 것이다.
엔비디아의 주가는 지난 27일 하루만에 16.97%나 폭락해 시가총액이 5890억달러(약 866조원) 내려가며 세계 증시 역사상 가장 큰 일간 시가총액 하락을 기록했다.
인공지능 및 반도체 관련주로 구성된 필라델피아 반도체지수는 9.15%나 폭락해 코로나19 충격이 가해진 지난 2020년 3월 18일 이래 최대로 떨어졌다.
세계 최대 반도체 기업인 대만의 TSMC도 13.33%, 반도체 장비 기업인 네덜란드의 ASML은 5.75% 급락했다.
미국 상무부는 딥시크 개발 과정에서 중국 수출이 금지된 미국산 첨단 AI 반도체가 사용됐는지 조사에 들어갔다.
로이터 통신은 이 같은 사실을 지난 30일(현지시간) 보도하면서 미국산 첨단 반도체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아랍에미리트 등을 통해 중국에 조직적으로 밀수된 정황이 있다고 덧붙였다.
R1 개발에 엔비디아의 저가형 칩 H800을 사용했다는 딥시크의 주장과 달리, 일부에선 딥시크가 중국 수출이 금지된 엔비디아의 고성능 칩 H100을 몰래 확보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트럼프 집권 2기 상무장관 지명자인 하워드 러트닉 역시 29일 상원 인준 청문회에서 딥시크가 미국의 수출통제를 우회했을 가능성을 지적했다. 그는 "그들이 우회 방법을 찾아 대량으로 사들인 엔비디아 칩이 딥시크 모델을 구동한다"면서 "우리와 경쟁할 거라면 경쟁을 받아들이되 우리 도구를 이용하게 하는 일은 멈춰야 한다. 이 점에 대해선 아주 강하게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밖에 미국 해군과 국방부는 딥시크 앱 사용을 금지했고, 미국의 국가안보위원회(NSC)는 딥시크의 국가 안보 위험 조사에 나섰다.
오픈AI와 마이크로소프트(MS)도 딥시크 조사에 나섰다. 딥시크가 AI 모델 훈련 과정에서 오픈AI의 데이터를 무단으로 수집했을 가능성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블룸버그통신과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 29일 오픈AI와 MS가 딥시크 데이터 수집 경로를 분석 중이며, AI 기술 유출 여부를 검토 중이라고 보도했다.
오픈AI는 "일부 중국 기관이 자사 AI 도구에서 데이터를 대량으로 추출하려는 시도를 해왔다"고 밝혔으며, MS도 관련 정황을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MS 보안 연구팀은 지난해 가을, 딥시크와 관련된 계정이 오픈AI의 애플리케이션 프로그래밍 인터페이스(API)를 이용해 대량의 데이터를 가져가는 정황을 포착했다. 오픈AI는 이에 따라 의심 계정을 차단했으며, MS와 협력해 추가 조사를 진행 중이다.
딥시크의 이용약관에는 사용자 데이터를 중국 서버에 저장하며, 해당 데이터가 중국 법에 따라 관리된다는 내용이 명시돼 있다.

개인정보 유출 우려에 이탈리아에선 차단…독·영·프도 규제 검토
유럽도 긴장하긴 마찬가지다. 지난 30일(현지시간)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이탈리아 데이터보호당국 가란테(Garante)는 개인 정보 사용에 대한 불투명성을 이유로 중국 AI '딥시크'를 차단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딥시크 앱은 이탈리아의 애플 앱스토어와 구글 플레이스토어에서 접근이 불가능해졌다.
가란테는 "딥시크가 제공한 개인정보 보호 관련 정보가 완전히 불충분하다"며 이탈리아 내 서비스 차단을 결정했다고 31일 밝혔다. 앞서 가란테는 딥시크에 △수집하는 개인정보의 종류 △수집 출처 △수집 목적 △법적 근거 △중국 내 데이터 저장 여부 등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요구했다.
가란테는 앱 차단과 더불어 딥시크 관련 조사도 개시했다. 파스콸레 스탄치오네 가란테 기관장은 "EU의 개인정보 보호 규정(GDPR) 준수 여부에 대한 심층 조사를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EU는 GDPR로 엄격한 개인정보 보호 규정을 적용하고 있으며, 이를 위반할 시 전 세계 연 매출의 4%를 최대 과징금으로 부과한다.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독일, 영국, 프랑스와 같은 유럽 국가들도 딥시크에 대한 규제 검토에 나섰다.
피터 카일 영국 과학혁신기술부 장관은 외신 폴리티코와의 인터뷰에서 “딥시크의 규모와 영향에 대해 면밀히 검토하고 올바른 시스템을 거치도록 할 것”이라며 “다른 신기술에 대해서도 그렇듯, 우리 시스템이 이것을 살펴보고 애초에 안전한지 확인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폴리티코는 영국 정부가 통신 관련 정보기관인 정보통신본부(GCHQ) 산하 국가사이버보안센터가 기술적 위험 요인을 살피는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프랑스 국가정보자유위원회(CNIL)도 데이터 보호 측면에 관한 위험성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딥시크 측에 시스템 작동 방식 등에 대해 질의할 예정이라고 지난 30일 밝혔다.
독일 매체 차이트는 독일 당국이 딥시크 앱에 대한 규제 조치 가능성을 살펴보고 있다고 보도했다.

SK하이닉스·삼성전자 주가도 폭락…여당 긴급간담회
국내 기업들의 주가도 하락했다. 31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전 거래일 보다 2만1800원(9.86%) 내린 19만9200원에 거래를 마쳤다. 주가는 장 초반 11.85% 내린 19만4800원까지 밀리기도 했다. 엔비디아의 그래픽처리장치(GPU) 수요 감소가 나타날 것이란 우려 때문으로 풀이된다.
SK하이닉스는 현재 엔비디아에 HBM을 사실상 독점 공급하고 있다. 최근 GPU 외에도 주문형 반도체 시장으로 고객사 저변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HBM 수요는 꾸준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삼성전자는 전 거래일 대비 2.42%(1300원) 하락한 5만2400원에 거래를 마감했다. 장 초반 삼성전자는 3.72% 하락하며 5만1700원까지 밀리기도 했다.
삼성전자는 31일 진행된 컨퍼런스콜(전화회의)에서 딥시크에 대해 "시장 내 장기적 기회 요인과 단기적 위험 요인이 공존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업계 동향을 주시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GPU에 들어가는 고대역폭메모리(HBM)를 여러 고객사들에게 공급하고 있는 만큼 다양한 시나리오를 두고 업계 동향을 살피고 있다"고 답했다.
전력기기 관련주 주가도 일제히 떨어졌다. 딥시크의 AI 모델이 상대적으로 낮은 성능의 하드웨어로도 높은 성과를 보이면서 관련 투자가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전력설비주로 분류되는 효성중공업은 전 거래일 대비 11.71%(5만9500원) 급락한 44만8500원에 거래를 마감했다. 가온전선(-11.32%), HD현대일렉트릭(-7,87%), LS(-6.90%) 등 다른 전력주들도 동반 약세를 나타냈다.

이 가운데 여당도 딥시크 출시에 대응하는 모습이다. 권영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비롯한 당 지도부와 AI특별위원회 위원들은 31일 오후 '딥시크 여파에 따른 우리의 AI 대응전략' 긴급간담회를 진행했다.
권 위원장은 "미국과 중국 간의 기술 패권 전쟁이 AI분야까지 옮겨져 갔다"며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 기술 격차가 더 벌어지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어 "중국의 딥시크 공습은 우리에게도 위기이지만 대응만 잘하면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딥시크 쇼크는 AI가 더 이상 소수의 독점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준 계기이며 AI의 대중화를 이끌 도화선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안철수 AI특위 위원장은 긴급간담회 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딥시크는 위기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는 기회 요소가 더 많다고 생각한다"며 "하드웨어 투자가 부족한 우리나라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는 "만약 추가경정예산(추경)에 합의한다면 크게 2가지로 민생 경제 추경, AI 추경이 핵심이 될 것"이라며 "제대로 된 예산안을 내도록 시간을 맞춰서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