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피알=김병주 기자 | 신약 하나를 개발하기 위해 통상 10년 가까운 시간과 수천억 원의 비용이 든다는 말은 이제 점차 옛말이 되고 있다. 제약업계에 인공지능(AI)이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후보물질 발굴부터 임상 설계까지 전 과정의 체질이 바뀌고 있어서다.
보건산업진흥원에 따르면 임상 1상 성공률은 기존 55~65%에서 AI 적용 시 80~90%까지 높아질 수 있다. 신약 개발에 평균 15년의 시간과 3조원의 비용이 필요하지만 AI는 이를 7년과 6000억원 규모로 줄일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AI가 단순한 효율화 수단이 아니라 신약개발 성공 공식을 다시 쓰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글로벌 빅파마들이 이미 AI를 R&D(연구개발)의 핵심 도구로 삼고 있는 가운데, 국내 제약사들도 자체 플랫폼을 구축하거나 글로벌 협업과 공공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식으로 저마다 AI를 품는 데 나섰다.
대웅제약과 JW중외제약은 자체 플랫폼 내재화를 통해 내부 연구자들의 활용도를 높이고, 한미약품과 유한양행은 외부 네트워크와 연합학습으로 확장을 꾀하고 있다. 접근법은 달라도 AI를 단순 도구가 아닌 핵심 인프라로 삼는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대웅제약, 연구 현장의 일상으로 자리 잡은 ‘DAISY’
대웅제약은 국내 제약사 중 가장 먼저 AI 전담팀을 꾸린 회사다. 2021년 시작된 AI 신약팀은 지난해 독자적 플랫폼 ‘DAISY(Daewoong AI System)’를 완성했다. 약 8억 개 화합물 DB와 가상탐색·분자구조 최적화·약물성질 예측까지 통합한 전주기 시스템이다.
이 플랫폼을 통해 다중 표적을 겨냥한 비만·당뇨 후보물질을 2개월 만에, 항암 후보물질을 6개월 내에 도출하는 성과를 냈다. 기존 방식으로는 수년이 걸릴 작업이다. 무엇보다 연구자들이 매일 접속해 후보 설계까지 직접 수행할 수 있게 되면서 AI가 ‘연구자의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대웅제약 관계자는 “올해는 LLM(거대언어모델) 기반 신약개발 모델을 만들고자 한다”며 “5년 내 글로벌 AI 신약개발 20위권 진입”을 목표로 제시했다.

JW중외제약, 통합 플랫폼 ‘JWave’로 임상까지
JW중외제약은 통합 플랫폼 전략을 택했다. 기존 플랫폼 ‘주얼리(Jewelry)’와 ‘클로버(Clover)’를 하나로 묶은 ‘제이웨이브(JWave)’는 500여종 세포주와 오가노이드(Organoid, 장기유사체), 4만5000건 이상의 화학 데이터를 학습해 후보 탐색, 약물 디자인, 독성 예측을 한 번에 수행한다.
통풍 치료제 ‘에파미뉴라드’가 임상 3상, 아토피 치료제 ‘JW1601’이 임상 1상까지 진입하는 등 성과도 이어지고 있다. 항암제·탈모 치료제 후보 역시 AI 플랫폼에서 발굴돼 개발 중이다. 미국 정밀의료 기업 템퍼스(Tempus AI)와 협업해 임상 데이터 분석 및 바이오마커 탐색을 확장하는 것도 특징이다.
JW중외제약 측은 “JWave를 활용해 기존 주얼리와 클로버 대비 신약개발에 걸리는 시간과 비용이 25~50% 이상 줄어들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협업의 성과’…한미약품은 공공 프로젝트, 유한양행은 정밀의료 접근
한미약품은 외부 협업과 정부 프로젝트 참여를 병행하고 있다. 지난해 AI 스타트업 아이젠사이언스와 업무협약을 맺고 항암 후보물질 탐색에 나섰으며, 보건복지부·과기부 공동 프로젝트인 ‘K-멜로디 연합학습 사업’의 주관 연구기관으로도 참여해 공공 데이터를 활용한 ADMET(약물의 흡수∙분포∙대사∙배설∙독성) 예측 모델 개발에도 나섰다.
또 자체 플랫폼 HARP를 활용해 비만 치료제 후보물질 ‘HM17321’을 발굴했으며, 임상 진입을 준비하고 있다.
유한양행은 AI 협업을 통한 정밀의료 접근을 확대하고 있다. 온코마스터·휴레이포지티브와 함께 AI 기반 치료반응 예측 플랫폼을 공동 개발해 바이오마커 발굴과 환자군 선별에 나섰다
신테카바이오와의 협업을 통해 유전체 데이터 기반 AI 연구도 추진 중이다. 과거 글로벌 AI 항체 신약기업과의 공동연구 경험까지 더해, 협업을 통한 역량 확장이 특징이다.

AI 신약개발, 가능성에서 검증으로
AI를 핵심 인프라로 삼고 있는 네 제약기업들에게 남은 과제는 데이터 품질 확보와 임상단계 성과 검증, 그리고 규제 체계 마련이다. 업계에서는 후보 발굴 속도를 높인 것은 분명한 성과지만, 결국 실제 환자 치료로 이어지는 임상 성과 확보가 관건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재국 한국제약바이오협회 부회장은 “임상에만 수천억원에서 수조원의 비용이 소요되는데, 기업이 모든 과정을 자체적으로 추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며 “정부의 전 과정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과 전략적 접근이 절실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결국 AI 신약개발은 더 빠르고 정밀한 후보 발굴이라는 ‘가능성의 영역’을 넘어, 임상 성과와 제도적 기반 마련이라는 ‘검증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이 마지막 관문을 넘어설 수 있을 때 AI는 한국 제약산업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